# 미지근한 신앙인이여 -데린쿠유를 기억하라.
글/사진: 이종원
대자연의 경이로움 -괴레메 계곡
괴레메 계곡. 보통 '괴레메 파노라마'라고 부른다. 화장지의 올록볼록 엠보싱처럼 생긴 버섯모양의 바위는 제각각 모양을 가지고 솟아 있었다. 대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움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평생을 살면서 이런 광경을 보게 해주신 내 주님께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드린다.
자세히 보면 흰색,녹색, 붉은색 바위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바위는 나사처럼 홈이 패인 것도 있고 , 암반처럼 부드러운 언덕을 이룬 것도 있고, 그것이 파도가 되어 너울너울 춤추고 있었다. 카파도키아의 바다
그 바위를 파내어 굴을 만들었고 그 곳에서 전쟁을 피해, 박해를 피해 신앙을 키워나갔기에 더욱 성스럽게 보인다.
솜털 같은 구름이 엠보싱 바위를 덮었을 때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이 황홀한 파노라마를 내 카메라에 담은 것을 감사한다. (달새님 사진 제공)
감동은 함께 하면 배가 된다. 35배의 감동이 새가 되어 훠이훠이 날아 괴레메 계곡 어느 버섯바위마다 살포시 앉을 것이다. 터키의 황홀한 추억은 그곳에 고이 간직하다. 그러고 보니 우람찬 버섯 바위보다 예쁜 영혼을 가지고 있는 모놀식구들이 훨씬 예쁘다.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징....
터키 아이스크림
이른 봄이라 난 터키에서 이 아이스크림을 못 볼 줄 알았는데....전세계에서 가장 딱딱한 아이스크림이다. 밀가루반죽 더 딱딱해서 아무리 반죽을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고 그리고 가장 잘 늘어나는 아이스크림이다. 우유가 아니라 산양의 젖으로 만들었기에 맛이 색다르다. 국내 최고급 아이스림의 공기 함유량이 20% 라는데 이 아이스크림은 0%다. 한국까지 명성이 나있어 최근에 체인점이 생겼다고 한다.
괴뢰메 야외박물관
해발 4천미터의 에르지예스산이 화산 폭발하면서 거대한 마그마가 엉기면서 굳어졌고 그 화산재가 비바람에 씻기면서 이런 황홀한 풍경을 만든다. 바위산은 화산재이기 때문에 부드러워 도구를 이용해 쉽게 주거지를 만들 수 있었다.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해서 일부러 이곳을 찾아 집을 짓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긴 백두산의 금강계곡도 이런 지질이 아닌가? 산도 울창하고 숲까지 우거젺기에 잘 만 가꾸면 이곳보다는 더 멋진 곳이 될 것이다.
이곳 암굴은 처음에 히타이트 사람들이 터전을 잡았고, 페르시아때까지 주거용으로 사용되었다. 로마의 지배를 거치면서 이곳은 절제와 금욕을 중시하는 수도사들의 신앙처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만 3000여개의 동굴수도원이 있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의 신앙심을 엿보게 된다.
아랍과 투르크까지 이 땅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이 카파도키아를 휩쓸고 갔고, 이슬람에 대항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그리고 전쟁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민들의 자구책으로 이런 주거형태는 더욱 늘어났다.
문화는 이런 필연이 만들어낸다.
지붕없는 노천교회이자 박물관은 총 13개로 이루어졌다. 산책로를 따라 거닐어 보자.
암굴마다 수도사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했을 것이다. 괴레메 계곡을 보면서 혹시 이곳이 천국이 아닐까 상상도 해보고....경이로운 대자연을 보면서 나약한 인간은 성전에서 무장해제 당한 마음을 추스리고 스르르 무릎을 꿇었는지 모른다.
산책하고 있는 모놀식구...이 길을 잊지 맙시다.
산책로를 따라 교회가 이어지고 있다. 바위 하나가 교회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여인이 이 멋진 광경을 보고 시를 쓰고 있었다. 그런 여유가 부럽다.
하도 교회가 많다보니 나도 헷갈린다. 이곳은 샌들교회 입구인가?
바위마다 교회가 하나씩 자리잡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경치가 끝내준다.
캐서린 예배당 같기도 하고...
위로 올라가면 바위교회와 괴레메 계곡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차륵르교회(샌들교회)
입구 정면에 두 개의 발자국 모양 때문에 '샌들교회'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스람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했기 때문에 프레스코화의 인물 대부분은 눈이 지워져 있다. 그나마 다 파괴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긴다.
벽에 회칠을 하고 물감을 입힌 프레스코화는 대개 9세기부터 11세기의 것 들이며 대개 성상파괴시대 이후의 그림들이다. (843년)
기둥의 치장이나 돔장식도 기교를 부렸고, 벽화 천장에는 파란색과 붉은색의 성화가 가득하다.
천장에는 예수님과 마리와 그리고 요한이 보인다. 신학성서를 그대로 천정에 그려 놓았다. 천장이 바로 천국인 셈이다.
가운데 돔에는 예수와 마리아 요한이 그려져 있다. 성좌에 앉으신 예수님, 마리아의 탄생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 예수님의 무덤과 승천이 그려져 있다. 굳이 글을 몰라도 그림이 주는 메시지에 신앙심이 절로 난다. 성전 자체가 복음이다.
교회에는 예배당뿐 아니라 음식저장실, 취사실, 식사공간등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반에 놓였을 십자가를 상상해 본다.
동굴안 식당. 40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 역시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굴을 파기 전에 미리 식탁을 설계했을 것이다.
성캐서린 예배당. 캄캄하기 때문에 후레쉬를 비춰야 한다.프레스코가 아니라 돌에 직접 그림을 그렸다.
초기 성화는 어린이가 낙서해 놓은 것 같은 무늬만 있다. 직접 인물을 그릴 수는 없고 원시벽화처럼 십자가와 포도송이, 물고기 신앙의 상징물을 그려 넣었다. 아마도 이것은 8-9세기경 성상파괴운동 기간동안 교회를 실제 성상의 모습으로 장식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이런 상징적인 무늬가 대신했다. 그림에도 역사와 시대가 묻어 있었다.
이런 문양들은 훗날 이스람교에 영향을 미쳐 '아라베스크'라는 기하학적 무늬로 발전한다. 이스탄불 모스크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이런 문양을 발견하게 된다. 성소피아 성당이 아랍의 모스크에 형식에 미친 것 가까지 감안하면 ....이슬람과 기독교는 그 뿌리를 찾아가면 하나인데 , 인간의 욕망이 불신을 만들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영혼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거닐고 있다.
성서와 코란의 조상 아브라함이 통곡할 일이다.
석가탑과 다보탑 중에 어느 탑이 맘에 드냐고 묻는다면 주로 화려함을 좋아하는 젊은 사람은 다보탑, 단순미를 좋아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은 석가탑을 뽑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화려한 프레스코화보다 이런 단순과 절제미가 나를 더 감동시킨다. 급기야 데린쿠유에 가면 아무 문양도 없는 성전을 보게 된다. 그 비어있는 벽에 내 감동을 원없이 새길 수 있어 좋다.
초기 성화는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붉은색 황토를 재료를 사용했다. 보좌에 앉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눈, 코, 입이 없었다.
누가 없앴는가? 바로 인간이다. 이 땅의 고통을 온몸으로 보여준 가장 예수다운 얼굴이다.
뱀의 교회 가기전에는 무덤도 보인다. 이곳에 누우면 어떤 생각이 들까?
사과교회(엘마르교회)
주변에 사과가 많아 이런 이름을 얻었는데....4개의 기둥위에 둥근 십자가 구조로서 전형적인 중앙돔형식이다. 중앙 높은 창을 만들어 빛도 충분히 들어오게 했다.
예수님.. 베드로와 바울이 주님을 지키고 있다.
정면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 새겨져 있다. 파란 배경이 붉은 예수님을 더욱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예수님과 대천사 그리고 성인들 모습.
수녀들의 수도원
입구 바로 왼쪽 뾰족한 바위 요정에 자리잡은 6층짜리 수도원이다. 1층과 2층은 식당과 방이고, 3층에는 11세기 양식으로 색칠된 제단이 있는 신전이 있으며 4층과 5층은 데린쿠유처럼 멧돌형 문이 가로 막고 있다. 이는 수녀들이 안전을 위해 위험시 터널을 폐쇄하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그 뒤쪽 바위는 남자 수도원이다.
내부 벽화다. 왼쪽에 있는 그림은 예수의 봉헌을 그리고 있다.
데린쿠유 지하도시
버스는 30분쯤 눈보라를 뚫고 남쪽 데린쿠유마을에 에 닿았다. 이런 험악한 날씨에 우리가 갈 일정이 지하도시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오늘 파샤계곡이나 괴레메가 일정에 잡혔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데린쿠유는 겉보기에는 별볼일 없는 작은 마을이다. 화장실 딸린 매표소 건물만 달랑 서 있어 지하에 거대 도시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앞에 있는 작은 문이 지하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제 슬슬...내려가보자.
높이 150cm, 너비 60cm의 작은 굴이 거미줄처럼 수 십km나 이어졌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선명한 신앙의 발자국이 보였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들이 오르내렸다고 생각하니 목이 메인다.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란 뜻이다. 60년대 어린 목동이 양 한 마리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하도시는 일반인에게 공개된지는 불과 40년밖에 되지 않았고 수 천년 동안 어둠속에 묻혀 있었다. 지하 8층까지 발견되었지만 아마 17~18층(120m)까지 추정하고 있으며 땅을 파면 팔수록 신앙의 깊이는 깊어만 간다. 9km나 떨어진 인근 카이막르 지하도시까지 연결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나 대담성을 생각해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데린쿠유만 총 2만명을 수용하는 규모라니 경북 영양군에서 온 달새님이 한마디 던진다.
'영양군 전체 인원이 2만명이 안되는디....'
아나톨리아 기독교인들은 1~3세기동안 로마인들의 침입으로 땅속으로 지하도시를 만들고 이곳에 피난 왔다. 근처 카이막클리와 오느코낙등 30여 개의 지하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기독교들은 빛 한점 없는 이 암흑도시에서 무슨 희망으로, 어떤 힘으로 살아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들의 살가운 삶을 만나 보고 싶다. 평생을 바위굴에서 살다가 아무 희망없이 죽어간 사람을 보면서 살아갈 맛이 났을까? 그 신앙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 신앙심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직경 1.5m의 무게 300kg의 둥근 멧돌형 돌빗장이 가로 막고 있다. 위급할 때 안에서 그 돌로 통로를 막음으로써 통행을 차단했으며 중앙부의 구멍을 통하여 침입자를 감시했다고 한다. 필요시 긴 창으로 적을 찔러 죽였다고 한다. 지하에 있는 도시는 사계절 14~15도을 유지했으며 기름등잔의 열만으로도 충분한한 난방이 가능했다고 한다.
포도주 공장이다. 위에서 포도를 쏟아 부으면 창고로 쏟아지며 그 곳에서 예쁜 처녀가 포도를 밟으면 즙이 옆 배수구를 통해 아래로 가죽부대로 떨어져 오랫동안 보관한다고 한다. 아가씨의 발냄새가 잘 스며야 포도주 맛이 좋다고 한다.
동물들에게도 포도주는 신경안정제다. 가축들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아우성치면 포도주를 먹이면 한동안 조용했다고 한다.
아래로 연결된 통로. 미로로 이루어져 화살표시가 없으면 잃어 버리기 쉽상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고속도로도 보이고 적을 유인해 나락으로 빠뜨리는 함정도 보인다. 무릎 높이의 홈을 판 성냥갑 형태의 침대도 보이고, 어깨 높이의 홈에는 투박한 십자가를 세워 놓았을 것이다. 처음 발견시 가재도구나 가구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자 다함께 자유를 찾아 굴을 빠져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 백년간 암흑속에서 살다가 '신앙의 자유'라는 은총을 받고 땅 위에 올랐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볕이 드느 땅 위가 바로 천국으로 여겼을 것이다.
지하도시의 허파역을 하고 있는 통풍관이다. 바깥세상과 연결한 유일한 통로다. 이런 통풍구는 무려 56개나 뚫려 있으며 지하도시의 숨구멍 역을 했다. 수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우물도 여럿 있다. 독약을 탄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럿 팠다고 한다. 늘 바깥세상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곳은 천문관측대 역할도 했다고 한다.
통풍관 아래 역시 까마득하다. 급한 일이 있을 때 이 고속도로를 통해 위급함을 알렸다. 자세히 보면 홈이 파여있어 위아래로 재빨리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으며 물건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줄이 매달려 있었다.
초대교회의 지하예배당이다. 십자가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옹기종기 앉아 성가를 부르며 기도하며 신앙의 힘을 키워 나갔다. 나약한 신자들에게는 용기를, 죽은자에게는 영생을....
괴레메 야외성당처럼 프레스코화나 벽에 그린 성화도 없다. 오로지 말씀과 믿음 그리고 순명만으로 신앙을 이어나갔다. 정갈하고 무덤덤한 분위기가 좋다.
옹기에 십자고상을 넣고 복음을 전파한 우리네 선조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투박한 질그릇, 진흙으로 만들어진 십자고상을 지하동굴에 옮겨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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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를 맞는 장소란다.
돌아온 탕자 맵시님이 부른 성가가 성당에 울려 퍼졌다. 천상의 노래가 주는 감동이 이렇게 크다.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편장에서 많은 반성을 했으리라 믿는다. 저절로 무릎이 꿇려지고 두 손이 모아진다.
다시 지하로 내려간다. 카메라 장비도 무거운데다 몸까지 무거워서 이동할 때마다 여간 고역이 아니다.
만약 내게 이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분에 못이겨 뛰처나갔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어렵게 얻은 종교의 자유인데......지금 나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신앙은 쟁취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 '
한땀 한땀 바위를 파낸 흔적이다. 그 눈물과 땀방울은 믿음과 확신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파낼 수 없다.
엉금엉금 스머프가 되어 다시 올라왔다.
신앙의 도피처가 아니라 작은 공동체였다. 신학교는 제일 위층에 자리잡고 있는데 물을 받아 세례를 줘야하기 때문이다. 학교답게 바위도 홍예로 다듬어 놓았다. 자식이 태어나도 신앙이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이런 철저한 교육의 효과가 아닐까? 뒤쪽 높은 곳이 선생님이 수업을 했던 곳이다.
학교옆은 양,말,노새를 기르른 구유가 자리하고 있다. 적이 공격해올 경우, 제일 먼저 연료를 사용하기 위해 말리던 짐승의 배설몰을 입구에 던졌으며, 2단계로 이 짐승들을 마구 소리처 소란스런 소리를 내 비상사태가 발생했음을 알림으로써 안에서 피신할 시간을 벌개 해주었다.
곡식을 저장해 두었던 창고다. 동물들 틈에서 잠시 눈을 붙였던 목동이 떠오른다.
출구로 나왔다. 입구와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았다. 바깥세상에서 도무지 지하에 거대 도시가 있다는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도시 위에는 그리스 정교회가 서 있는데 그나마 그리스인들이 쫒겨나면서 텅빈 건물만 외롭게 서 있었다. 어떻게 얻어낸 신앙인데....
이제 버섯도시 카파도키아를 떠나야 한다. 카파도키아에는 창조주가 만들어낸 황홀한 버섯바위가 있었고, 바위 끝까지 목숨을 이어가는 살가운 삶과 그리고 암흑세계에도 변치 않는 신앙인이 있기에 난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이야." 라는 강렬한 메시지가 내 심장 깊숙한 곳에 박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