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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mose 2009. 5. 15. 09:02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 점치는 풍경.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임. 점보는 풍경을 그린 것 같은데 복장이

한국인의 복장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음.



 

 

▲ 제물포 풍경과 양반.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로 제물포항과 양반의 모습을 그렸음.


 

 

▲ 서울풍경과 조선군.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 비인 현감 이승렬.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한국의 모습이 서양인에 의해
처음 그려진 시기는 19세기 초이다.
1826년 2척의 영국 함대가 백령도 등 서해안 탐사 중에
조선인들과 수차례의 접촉 기회를 가졌으며,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해안 지역을 방문했다.

당시 이들의 체험담은 1817년 알세스트호의 군의인 맥레오드와

1818년 라이라호의 함장 바질 홀에 의해 각각 항해기로 출간되었다

 

이 그림은 바질 홀 함장의 항해기에 게재된 그림으로

홀 일해의 상륙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비인 현감 이승렬의 모습이다.

홀 함장은 귀로인 1817년 8월 12일에 아프리카 서해안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었던 나폴레옹을 방문하였다.


나폴레옹과 홀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피리의 브리엔느 유년 사관학교에 다닐 적에
나폴레옹은 그가 가장 아끼던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홀은 그가 스케치해 온 조선의 풍물을 보여 주었더니
당대의 영웅 나폴레옹도 갓을 쓰고 흰 수염을 한 노인을 가리키며,
"아, 이 긴 담뱃대, 참 보기 좋다.'라며 매우 신기해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조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물어 보았다고 한다.

이때 홀은 대답하기를, '이 나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어서 이제까지의 유서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선량한 민족'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빙긋이 웃으며,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도 있다더냐?
내게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보리라'고 말했다.

 
▲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관리들의 큰 모자와 담뱃대, 그리고 일산 등이 그려져 있다.



▲ 소청도 주민들.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소청도 주민들을
그린 것이다. 뾰족하고 커다란 모자를 쓰고 긴 담뱃대를 들고 있는
조선인들 그리고 어촌의 초가 등이 특징있게 부각되어 있다. 


▲ 배재학당 교사.
아펜젤러가 촬영한 배재학당 교사의 모습.

 
▲ 엿장수 소년들.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 외국에서 발행된 엽서로 추산이라는 곳의 거리 풍경임.
추산이 어디인지...

 
▲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
조선시대에는 딸을 낳으면 크게 환영받지 못한데 비해,
아들을 낳으면 집안의 경사일뿐만 아니라
아들을 낳은 여인은 '누구 누구의 모친'이라는 경칭을 얻고
시댁에서의 발언권이 확실해진다.

이런 가부장적 태산(胎産) 문화 속에서
심지어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이란 비법도 유행했다.
전녀위남법이란 '임신 중 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방법'을 말한다
가문을 이을 자손을 낳지 못하면
소박맞는다는 생각이 널리 펴져 있었던 시절,
후사를 잊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그 가운데 '임신 중여아를 남아로 바꾼다'는
이른바 전녀위남법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이다.
가슴을 내놓는 행위는 젖먹일 아들이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었고 흠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서양인들의 기록에는 매우 흥미롭게 이러한 여인들을 기록하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나 서울에 있는 동안에도,
밖에 나와 있는 여자들이 드물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밖에 나와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독특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젖가슴까지 내놓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매우 박색인 까닭으로
처음에는 이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손 그렙스트 『코레아 코레아』1904)
시골보다는 서울에서 더 많이 보이는 여인들의
 외출할 때 모습은 더욱 이색적이다.
외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문 밖을 나설
때는 꼭 동방 마호메트 여인들처럼 몸과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머리 위까지 녹색 장옷을 뒤집어쓴 모습은
마치 몸체가 보이지 않게 요술 수건을 쓴 유령이 돌아 다니는 듯하다.

이렇게 몸을 칭칭 감싸면서까지 여성의 미덕을 보존하겠다는 가냘픈 조선 여인의 태도는
모슬렘이나 터키 여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이렇게 몸과 얼굴을 싸서 감춘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거북스럽고 불필요한 의상을 조롱이나 하듯이 유방은 내놓고 다닌다.
(독일 기자 지그프리드 겐테  1901)
 
 

▲ 온돌,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다.
1093년 영국에서 발행된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 사진. 구들장(온돌)을 놓는 모습이다.
 
한국의 가옥들은 한결같이 나즈막한 단층이며
2층으로 된 서민의 집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 가옥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동양에서
오로지 그들만이 고안해 낸 온돌이라는 난방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인데,
실제로 아주 훌륭하고 독창적인 것이다.

한국의 집은 땅을 파고 기초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지면 위에 그냥 짓기 때문에 방바닥이 지면보다 약간 높아
온돌이라고 부르는 공간 사이에
나무나 짚 등을 때어 바닥을 덥히면 방안 전체가 훈훈해진다.
(이탈리아 총영사 까를르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 1904)

한국인들은 거의가 초가집에서 살고 있으며
기와집은 200호 중 한 집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다.
이러한 한국인들이 서양보다도 먼저 난방 장치를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방바닥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더운 연기가 지나면서
충분한 열기를 만들어 내는데 설치 방법도 간단하다.
이렇게 기막힌 난방법을 세계 속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 여행가 듀크로끄)

아궁이 밑에서 때는 불의 열기와 연기가 구들장 사이를 지지면서 방바닥을 덥힌다. 이러한 난방은 겨울철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따뜻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연료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확실히 권할 만하다. 사용하는 땔감도 나뭇가지나 통나무 등 저렴한 것이며, 이마저도 없다면 잡초, 나뭇잎 등 어느 것이라도 땔감으로 활용된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서민들은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 사람들보다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그런데 온돌방은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 차이가 커서 불이라도 많이 땐 날이면
아랫목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다.
100년 전 우리 나라를 여행했던 서양인들은 '따뜻함'을 훨씬 뛰어넘은
이 '뜨거움' 때문에 밤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기록에는 '사람을 굽는다'라든가 '사람을 지진다'
또는 '사람을 익힌다'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방안의 '냄새'도 그들에게는 고통이었다.
문이나 창문만 열어 놓지 않으면 오랫동안 보온이 되어
상당히 편리했으나 겨울에 방 안에는 신선한
공기가 너무 결핍되어 있는 것 같았다.
코레아 사람들은 실외에서는 옷을 아주 따뜻하게 입었고,
밤에는 펄펄 끓는 방바닥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게 아주 익숙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불편한 잠자리였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자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으나
얼마 후 추워서 다시 닫을 수 밖에 없었고, 오분 후에 똑같은 짓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리 신선한 공기가
많이 들어와도 방안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늘과 오물 냄새는 방 안에 아주 배어 있었다.
이 냄새가 순간적으로 심해질 때가 있어 그럴 때에는 속이 뒤집히려 했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코레아 코레아 > 중 )

방은 보통 가로 2.5미터, 세로 1.8미터 가량되는 조그마한 것이다.
그 곳은 열기와 벌레들, 빨래할 더러운 옷가지들과 '메주'라고 하는 간장을
 만들기 위해 발효시키는 콩,
그리고 다른 저장물들로 가득 차 있어
누워 잘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은 남겨두고 있다.
밤이면 뜰에 밝혀진 너덜너덜한 등롱과 방의 등잔불이 손으로 더듬거리며
활동할 수 있을 정도의 조명을 제공한다.
조랑말의 말린 똥까지 때는 여관의 방은 언제나 과도하게 따뜻하다.
섭씨 33도 정도가 평균 온도이며, 자주 35.5도로 올라간다.
나는 어느 끔찍한 밤을 방문 앞에 앉은 채로 새운
 적이 있는데 그때 방안의 온도는 섭씨 39도였다.
지친 몸을 거의 지지다시피 덥혀주는 이 정도의 온도를
한국의 길손들은 아주 좋아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1897 )

조선 집은 나지막하고 방의 크기는 약 6척 높이에 넓이는 8척 쯤이다.
이 나라에서는 나무를 아껴 써야 하는데도,
밖의 기온이 영하 15∼20도로 수은주가 내려가면
 사람들은 방이 뜨끈뜨끈하게 불을 땐다.

온돌방 밑에 네 골을 만들고 그 위에 얇고 넓다란 돌을 덮어서
그 위에 다시 흙을 바르고 맨 위에 기름에 절인 종이를 바른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방바닥은 우리 서양 사람들이 빵을 구어 낼만큼 뜨겁지는 않아도, 방바닥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경험해보지 않은 여행자는 까딱하다가는 엉덩이 살을 지지기에 꼭 알맞다.
이 곳 사람들이야 수백 년간 습관이 들었기 때문에 이 뜨거운 방바닥에서도 한편으로 돌아누운 채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잔다.
(1902년 애쏜 써드의 『서울 견문록』중에서)
▲ 궁궐 수비대.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에
실려있는 사진으로 '궁궐 수비대'란 제목이 붙어있다.
 
 
▲ 고종황제.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에 실려
있는 고종 황제의 사진.

▲ 결혼한 한국남자.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Korean married man'
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음

 
▲ 궁궐에서 일하는 여인.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린 그림으로 제목은 'Woman employed in the palace'.

 
다양한 한국인들.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결혼한 여인', '겨울
모자를 쓴 여인', '궁중용 모자',
'옛 군인 모자(설명이 잘못된 듯)'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 지게를 진 남자.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년)
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지게를 진 한국인의 모습을 그린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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