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2 심화학습
*** 산청 구형왕릉. 동의보감촌. 남명기념관 ***
* 산청 구형왕릉 - 구형왕릉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하계리 산 16에 위치에 있으며 사적 제214호로 지정. 구형왕은 구해(仇:원수 구 亥:돼지해) 또는 양와(讓:시양할 왕, 王)이라고도 하는데 금관가야 10대, 마지막 임금이며 신라 김유신 金庾信) 장군의 증조부다. 이 능은 돌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 구형왕(증조부) - 김무력(조부) - 김서현(부) - 김유신
* 구형왕은 521년 금관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에 영토를 넘겨줄 때 까지 11년간 왕으로 재임.
* 이 무덤에 대해 왕릉이라는 근거 : 동국여지승람 권31<山陰縣 山川條>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문신인 홍의영 洪儀泳, 1750-1815)의 <왕산심릉기 王山尋陵記>에 "근처 왕산사 산사기권 山寺記券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산청현읍지 山淸縣邑誌에 의하면 정조 22년(1798)에 처음으로 왕릉이 기록되어 있다고 전한다.
* 이 무덤은 경사진 산비탈을 그대로 이용해 각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방형 方形으로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층의 등급이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닜다. 석열은 전면에서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가 뚜렷하지 않은데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단의 높이는 7.5m이고 제4단에는 폭 40cm, 높이 40cm, 깊이 68cm의 감실이 있다. 이 돌 무덤을 중심으로 높이 1m 내외의 둘레담장을 잡석으로 쌓았으며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 讓王陵"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다. 그 앞에 상석과 長明燈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석수石獸가 각각 1쌍씩 서 있는데 이 석물들은 최근의 설치물인바 돌무덤과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
* 이 자료는 심화학습 해설자료로 문지회에서 제공한 것이다.
▲우측 : 나와 아내
*아래 글은 이종원 문지회 회장의 글을 문지회 카페에서 옮겨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군 단위 이름에 '청'자가 들어간 곳이 청송(靑松)군, 청양(靑陽)군, 산청(山淸)군 등이 있다. 그 뜻을 생각하면 매력이 넘치는 지명이다. 산청은 지리산을 서쪽으로 끼고 있으니 그 맑고 깨끗함이 어디에 비하랴. 출발 전부터 전보다 어떻게 변했나에 관심이 쏠린다. 이래서 여행을 많이 하라했나보다.
문지회에서 심화학습 차(7/12) 찾은 곳이 산청이다. 당초 계획은 구형왕릉-동의보감촌-중식-대원사-내원사-남명기념관이었지만 공사중인 사연으로 대형차량이 들어갈 수 없는 두 절은 빠졌다. 모처럼 차량 두 대 85명이 함께하니 흐뭇한 느낌이다.
구형왕릉은 무질서하게 보이는 돌무덤이다. 7계단을 지어 위로 오를 수록 좁아지면서 피라밋을 연상하며, 가운데 용처가 불명한 감실이라 부르는 구멍이 있다. 숱한 무덤 중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모습이다. 구형왕[仇衡王]은 시조인 수로왕의 9세손으로 성은 김씨이다. 겸지왕(鉗知王)의 아들로 521년에 즉위하여 532년 신라 법흥왕에 항복했다.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조에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익히 알고 있는 김유신 장군의 증조할아버지다.
동의보감촌은 산청군에서 많은 돈을 들여 조성한 종합관광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워낙 넓고 다양한 시설이 있어 일일이 다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라 아래 사진과 배치도를 통해 짐작하기 바랍니다.
대원사 계곡은 재직 중에도 1박을 하며 추억을 남긴곳이고, 다른 모임에서도 다녀왔는데 지리산 분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절경인데 갈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다. 신라 진흥왕 9년(548)에 창건되었다니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있고, 비구니 참선도량이며, 보물 제1112호로 지정된 다층석탑이 볼거리의 하나다. 저번에 대원사까지 갔을 때도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 되는 곳에 탑이 있어 멀리서 탑의 윗부분밖에 볼 수 없었다. 문화재청 홈피에서 갖고 온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랬으면 한다. 내원사도 부근에 있다는데 국보 제233-1호인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 1113호인 3층석탑도 문화재청 사진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갖는다.
점심은 여태 심화학습을 다닌 중에 가장 비싼 음식이다. 동의보감촌 주차장에 '약초와 버섯골'(055-973-4479)이란 곳인데 한방 약제 등을 넣은 샤브샤브다. 1.5만원, 비싸기도 하지만 신선한 채소들이 샛빨간 쇠고기를 만나 펄펄 끓는 냄비에서 그 맛을 우려내니 맛이 그져 그만이다. 4명이 1병꼴로 준비한 반주가 모자라 현지 술을 사먹을 정도였으니 즐거운 비명이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의 기념관이다. 그는"조선 중기 학자로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조식 [曺植] (두산백과)
[출처] 그 이름에서 풍기는 매력, 산청(山淸)|작성자 주윤
* 동의보감촌
지리산을 품고 있는 산청은 우수한 각종 약초의 풍족한 자생적 생산으로 약초산업 발전을 위해 2010년 '동의보감촌'을 개장하였는데 경남 산청군 금서면 동의보감로 55 일원에 위피해 있다. 중심 공간인 '한의학박물관'은 지하1층, 지상 2층, 총 740평 규모에 여러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1층은 전통의학실로 우리한의학, 한의원 모습과 한방치료번 등을 소개하고 있고 2층 약초 전시실은 다양한 약초의 종류 및 효능 등의 소개와 입체영상, 산청군을 배경으로 허준 선생에 얽힌 가상 스토리 등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산청군은 이곳을 '산청 한방약초 산업 특그'로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지정받아 매년 9월-10월 경에 한방 약초축제를 열고 있다. 주요 공간으로는 전통의학 체험 공간인 주제관이 있고, 한방 氣체험장으로 귀감석과 석경, 복석정이 있다.
그리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산청일원에 자생하는 여러 종류의 약초를 모아 식재된 산청 약초관이 있다. 그리고 테마 별 여러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점심 - 약초와 버섯골식당에서 제일 맛좋고 비싼 것으로...?
* 남명기념관
조식 선생의 자는 건중 楗仲, 호는 남명 南冥, 별호는 산해 山海, 본관은 창녕 昌寧이며 경남 합천군 삼가현 토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선비 산림처사 山林處士이다. 경敬 과 의義를 앞세우고 실천한 남명 선생은 예禮 와 인仁을 앞세운 퇴계 이황李滉과 함께 영남학파의 쌍벽을 이룬 두 거두 였다.
남명 선생은 "군자는 敬으로써 안(마음)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바깥(행동)을 바라게 한다"라는 생의 좌우명을 더욱 철저하게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이 갖고 다니는 칼에다 '내명자경 외단자의 內明者敬 外斷者義' 즉 '안(마음)에서 밝히는 것은 敬이요, 밖(행동)에서 결단하는 것은 義다.'라는 글귀를 새겨 義의 상징으로 항상 가까이 했다. 또한 敬의 상징으로 성성자 惺惺子라는 방울을 항상 몸에 지녀 움직일 때마다 방울 울림에 마음을 깨우쳐 수련하였다 한다.
남명 선생은 학덕을 갖춘 大儒子엿으나 벼슬에는 낭가지 아니하고 평생 선비와 처사로 일관하였다. 38세 때 헌릉 獻陵 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이 제수되고 왕이 면대하기를 청하는 징소 徵召가 있었으나 매번 상소 봉사 封事로써 의견을 개진하였을 뿐 나아가지 않았다. 55세 때는 단성 현감에 제구되었으나 역시 퇴자 하였는데 이때 올린 상소문이 그 유명한 '단성 현감 사직소'(일명, 을묘 사직소)이다. 부패한 조정을 위해 재야 지식인으로서 품었던 의견을 가차 없이 표출하였다. 남명은 학문과 삶이 일치되는 것을 강조했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으며 민본이 그의 핵심적 사상이었다. 선생은 31세에서 48세 까지는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산해정'을 지어 후학들을 양성, 48세에서 61세까지는 고향 합천에서 '뇌룡정'과 '계부당'을 지어 학문 연구와 후학들을 가르쳤다. 사후 선조 임금은 영전에 제문을 내려 당대의 선비 기상을 기렸으며 광해군 7년(1615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追贈하였고 시호는 문저 文貞이라 하였다. 기념관 뒷산에 남명 선생 묘소가 사적 제 30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 참석한 월2팀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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