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對馬島) 여행기(旅行記) |
대마도(對馬島) 여행기(旅行記) 원래 이씨조선 멸망 전 까지는 대마도의 도주(島主)는 조선의 국왕으로부터 봉작을 받아 왔다고 한다. 대마도는 107개의 섬으로 되어있고, 유인도(有人島) 는 5개 밖에 없고 나머지는 무인도 여러 섬으로 형성된 땅이다. 거리는 부산에서는 49.5km 이고, 대마도에서 일본 본토 후쿠오까 까지는 138km 되는 곳으로, 우리나라 보다 일본 본토까지는 3 배에 먼 거리에 있는 섬이며, 한국이 더 가깝지만 먼 나라로 인식되는 나라 일본의 땅이다. 이 섬의 이름도 한국의 마산(馬山)과 마주 보는 섬이라 하여서, “대마도”라 이름을 지어졌다고 한다.
순종은 조선왕조 최후의 왕(27대)으로 즉위하던 해에 한일 신협약을 채결 하였고, 한국군을 해산 하였으며, 동양척식회사 설립을 허락하였으며, 사법권을 일본에 넘겨주었으며, 1910년에 한일 합방조약을 채결함으로서 나라를 잃게 되어서, 35년간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여 한국을 통 채로 삼켜 통치를 하면서 만행을 저질러왔다.
수선산 옆 사찰에는 김성일 호를 딴 작은 사찰 이름이 학봉사(鶴峯寺)에 갔을 때는 분개가 치밀어 올랐는데, 이 자는 선조 1년 중량문과에 급제 한자이고, 봉교(奉敎), 전언(正言),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 나주 목사,를 역임 하였으며, 1590년 통신부사가 되어서, 황윤길과 일본에 통신사로 가서, 일을 마치고 귀국을 하여 황윤길은 외국이 침략의 위험이 있으니 대비를 해야 함을 보고하였으나, 이 자는 이를 부인하면서 아무런 기미를 찾지 못하였으니, 염려 할 일이 아니라고 선조에게 거짓으로 고해 바첬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자신의 거짓 보고가 탄로 날까 전전긍긍 하다가, 유성룡의 변호에 위기를 모면하였든 사람 으로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의 사람으로, 김대중이라는 작자도 대마도 근해를 비롯한 7광구의 채굴권을 일본에 몽땅 넘기는 어업협정을 하였으니, 이놈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최익현 순국비를 보면서는 마음이 설래는 것은 또 왠 일 일까? 최익현은 을사보호조약이 1905년에 채결되자, 제자 임병헌과 함께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서 싸움을 하다가 패배하여 채포 되어서 대마도로 유배 되었다. 유배지에서 최악현은 식음을 전패하고 단식 투쟁을 하였는데, 그 이유가 적군인 왜놈들의 음식이라 먹지 않았다고 하였다. 유언을 임병헌에게 상소문을 올리게 하고, 결국에는 단식으로 인하여 사망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기념비 를 근간에 세워 두었다. 이 사람에게 한국 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였다.
덕혜옹주 결혼 기념 봉축기념비가 있는 공원 입구 누각은, 세월이 말하듯이 웅장한 모습이고, 주변의 소철이나 열대지방의 나무의 크기는 나이를 말하듯 너무나 크고, 우람찼다. 공원 안에 여러 종류의 화초들도 무성하지만, 꽃은 지고 앙상한 가지를 남긴 분위기는 옹주의 슬픈 사연을 말하는 듯, 침묵만 흐르는 듯하다.
와타즈미 신사에 오기 전 둘러본 공원에는 2차 대전당시의 군용 포대나, 훈련장, 동굴을 보면서 이런 곳에 까지 전쟁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우리 민족들을 납치하여 일을 시키고, 싸움터에서는 총알받이로 이용한 왜놈들의 심보도, 아직까지 양심에 가책도 없는지 사과하지 않고, 배상도 않는 놈들에 적개심이 불 같이 솟아오른다. 우리 땅 전국 곳곳에도 명당이라는 곳 마다 왜놈들이 백의민족의 기를 꺽는 다고 커다란 쇠못을 박아 놓았고, 점령당시나 2차대전시 포대며, 진지를 파 놓은 곳이 어디 한 두 곳이랴. 이 해궁신사 입구를 상징하는 석문을 보니, 4개가 있는데, 그 중 두 개가 특이하게 바다에 세워져 있다. 이 석문의 모형이 우리의 전통적인 만속문화의 솟대를 본 따서 만든 것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또 바다의 석문이 향하는 곳이 마산 이라고 하는데, 이는 확인이 안 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도 우리의 도공들을 강제 납치하여 와서, 도자기 문화를 발달시킨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일인데도, 왜놈들은 자기들이 도자기의 기술이 최고라고 세계에 떠드는 자들이다. 이 신사는 일본이 주장하기를 해궁신사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 초대 천황을 기념 하기 위한 값진 곳으로 인정한다고 하는데, 석문이 바라보는 곳이 한국이고 보니, 이들이 떠받치는 천황이 한국에서 온 것이라는 점을 알리는 듯하다, 실제로는 일본의 천황은 백제의 왕손이나, 가야국의 왕손들인 것이 중명된 것이다.
원래는 한 섬이 아니라, 가장 큰 섬을 두 개로 만들어서 러일전쟁을 숭리로 이끌 었다고 하는데, 1900년에 섬을 두 동강내고서 놓은 다리가, 만제키 다리(만관교)의 사연에도 건설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모든 일을 인력에 의존하다보니 사망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다리 옆에는 당시 사망한 사람을 위로 하는 불상을 세워 두고 매년 기념행사를 한다고 한다.
역사민속사료관의 유물들도 한국에서 건너간 유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전망대라는 곳은 한국의 부산과는 거리가 49.5km 로 맑은 날은 부산을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세워둔 팔각정의 모습도 한국의 모형을 본 따서 만든 것이고, 바로 앞에는 억울하게 사망한 한국인의 넑을 위로하는 기념비에는 통한에 숨진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100곳에 든다는 명소인, 미우다 해수욕장 중심 돌출부 바위에는 노송을 머리에 쓰고 있어서 외롭게 느껴졌다.
간소한 준비물을 챙겨 집을 떠나 동대구역에서 6시 무궁화호 기차로 BSC 대구회원 6명이 부산역에 도착하니, 서울 서진원국장이 마중을 나왔다. 아침 식사를 하고서 여객터미널에 도착을 하여서, 가이드 허경희씨의 도움으로 출국수속을 하고 승선하여 9:30분에 출항을 하여서, 2:50분 항해로 이즈하라 항에 도착을 하였다. 첫 날의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위해 마련된 미가(味加)식당에 들으니, 주인장 일본인 시노자키 테르오(蓧崎輝男)가 마련한 해물과 고기의 식단으로 배를 채워도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식사 후 호텔로 와서 방을 정해 놓고, 이왕 일본에 왔으니, 일본 술 맛 보고 가자고 하는 의론이 많아 시내로 나왔다.
선술집에서 생맥주 한잔씩 과 일본 소주를 마시고 계산은 남두환 회장이 희사 하였고, 누가 제안을 하였는지 은근히 취한 술기운인지, 걸어서 호텔로 가자고 하여서, 걷기로 하였는데 캄캄한 밤이라 호텔을 가야 하는데, 누구도 길을 아는 사람이 없어 마구 걷다가 잘못 길을 간 것이 아닌가 하고 불평을 하고, 다리가 불편한 이사장 문제로도 있고 해서 길을 물어야 하는데,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승용차가 오는 것을 잡아서, 일본어를 구사하는 이재교 회원의 도움으로 겨우 호텔에 도착을 하였는데, 2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운동 삼아 걸어서 온 것이 숙면에 도움이 되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히타카르 항에 도착을 하여서 출국 수속을 하고 승선하여 2시 50분에 출항을 하여서 43시 30분에 부산항에 도착을 하여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하선을 하여서는, 부산에 왔으니 자갈치 시장에 가서 해물을 저녁 식사 하자고 하여서 식당에 도착하여서, 꼼장어 구이를 안주 삼아 막걸리로 한잔 회포를 풀면서 여담을 나누었다. 식대는 김길수 회원이 협찬을 하였으며, 부산역에 와서 서울의 서국장은 KTX로 출발을 먼저 하고, 대구회원은 무궁화 호로 대구에 도착을 하니 9시 40분경이 되어 여행이 종료되었다.
2010 년 6월 26일 이규태 회원제공 부산 출국 사무소 출구 사무소 건물앞 광고물 카미자카 공원 전망대 안내판 덕혜옹주 결혼기념 봉축 기념비가 있는 금석성 수선사 절 의 중앙건물 조선국 통신사 김성일선생 기념비 출발항 히타카츠 인근 마을 수선사 절 의 일부분 츠시마 다이아 호텔 입구와 일행 다이아 호텔 후원에서 일출 장면 아소만 운하 만관교(보수공사중) 카미자카 전망대서 바라본 큰 가마귀(태공님 사진) 아소만 운하 입구 주변 경관 와타츠미신사 앞 도리이(석문)5개 있음 한국 전망대가 있는 조선역관사 순난지비 한국 전망대 한국전망대앞 부산이 보이는 방향 바다 전망대 앞 바다 미우다 해수욕장 앞 소나무가 있는 바위 석식후 찾아간 이자까야 술집 내부장식(태공님 사진) |
'이재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파와 서파 코스 (0) | 2010.07.07 |
---|---|
◎선인장의 아름다운 꽃들◎ (0) | 2008.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