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 성전 → 예배당
'제단' 이나 '성전'이라는 말 대신에 예배당 또는 교회당이라고 해야 한다. 신약시대에는'제단'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구약시대에도 제단은 성전 뜰에 있었다. 구약은 성전제도로 말미암아 제단에서 번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등의 제사를 드렸다. 소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단번에 (히 10: 10) 영원한 제사(히 10 : 12)를 드리심으로 더 이상'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는 성전제도가 필요없게 되었다. 신약시대 성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다(요 4 : 24).
성서 → 성경
성경은 "성서"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성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요 5 : 39, 딤후 3 : 16).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신 문자 계시이고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다. '성서'라는 말에 이러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는 분해적이며 주석적이고 설명적인 내용을 문서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속(俗) 문자에 대한 대칭적인 종교 문헌적 총칭이다. 광의적으로 주석류와 설교문도 성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書(서)'는 ① 책 ② 글 ③ 편지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문자로 쓰여진 책이라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성령님께서는 글자 한 자 한 자 감동하시어서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시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글자 하나 하나가 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서는 신적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성경'과는 구분된다.
성경을 어원적으로 보면'기록된 문서'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의 '비블로스'에서'책'이라는 뜻을 가진'비블리아'가 유래되고 이로부터 영어의 '바이블'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바이블'을 거룩한 정경(正經, Canon)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성경은'영감'(유기적, 완전축자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딤후 3: 16, 벧후 1: 21) 무오하고(시 119: 140) 하고 불변하는(마 5: 18) 진리이다. 말씀을 사모하고 진리파수를 생명으로 하는 교회라면 반드시 '성서'대신에 '성경'이라고 해야 한다.
성가대 → 찬양대
성가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표현하는 노래이고, 성가를 예배에서 부르면 찬송 또는 찬양이다.
'찬양대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는 예배위원이다. 따라서 성가대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찬양대라고 불러야 한다. 성경(특히 시편)에도 보면 모두'찬양하라'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 전까지'찬양대'라고 불렀었다. 그러던 것이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 聖歌隊)를 그대로 직수입하여 표현한데서 영향을 받아 오늘날'성가대'라고 호칭하는 곳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고쳐져야 한다.
기도했습니다 → 기도합니다
시제상 "기도했습니다"는 과거형이고, "기도합니다"는 현재형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현재 시제(時制)로 해야 한다. "기도했습니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분명히 과거시제의 표현이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는 곧 '소원'이기 때문에 이 '소원'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이라야 한다. 기도를 끝낼 때'현재형'으로 말하게 되면 이는 간구한 내용에 대하여 계속 소원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기도의 종결을 나타내는 어미(語尾)는 '기도합니다' 또는 '기도드립니다'가 되어야 한다.
휘장분배 → 꽃 달아드리기
흔히'꽃을 달아드는 것'을 휘장분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휘장(徽章)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모자나 의복에 붙이는 표를 가리킨다. 그리고 분배(分配)는'고르게 나누어 준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 말 역시 축하받는 사람에게 적용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따라서 '꽃 달아 드리기'라고 순수한 우리말을 쓰는 것이 좋다.
축제 → 잔치
'찬양축제','체육축제','전야제'등의 표현은 옳지 않다.'축제'라는 단어 자체가 이방종교의'제사'또는 제의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도 보면 축제(祝祭)란,"축하하고 제사하는 것"을 말한다고 되어있다.
'축제'라는 말 대신에 '잔치', '대회', 또는 '축하행사'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찬양축제는 성가대회로, 체육축제는 체육대회로, 전야제는 전야잔치로 하는 것이 옳다.
당신 → 하나님 아버지 또는 주님
기도할 때 하나님을'당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당신은 존대어가 아니다.
우리말의 2인칭으로서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기도할 때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육신의 아버지께 '당신'이라고 하면 안 되지 않는가?
성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언제나 극존칭 화법을 써야한다. 당신이라는 말을, 말하는 주객(主客) 당사자가 어떤 제 3자를 3인칭 격으로 지칭할 때는 웃어른을 높여 일컫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하오"체의 예사 높임말인'당신'이라는 말을 하나님께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대명사로 당신이라고 호칭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관계적 극존칭을 써야한다.
운명하셨다 → 돌아가셨다
'타계하셨다'라든지'운명하셨다'는 말 대신에'돌아가셨다'라고 해야 한다. 타계(他界)라는 말은 불교 용어이다. 불교의 십계(十界) 가운데 인간계 이외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므로'돌아가셨다'라고 해야 한다.
'돌아가셨다'는 말이야말로 매우 성경적인 말이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 성경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생명이 다하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말이니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소천(召天)하셨다 또는 하늘나라 가셨다가 좋고 별세(別世)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별세보다 더 좋은 말은 돌아가셨다 이다.
'영결식'이라는 말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성경적이 아니고,'고별식'역시 작별을 고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장례식이라고 해야 한다.
'삼우제'(三虞祭)라고 하는 말 대신에'첫 성묘'(첫省墓)라고 해야 한다.
점심도 만찬 → 점심은 오찬
저녁도 만찬 → 저녁은 만찬
더러 '예배 후에 만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하는 광고를 들을 때가 있다. 점심때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점심을 드시고 가라는 말이 아니라 예배 마친 후 저녁때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식사를 드시고 가라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만찬(晩餐)은'저녁식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점심을 드시고 가시라고 하려면'예배 후에 오찬(午餐, 점심을 가리키는 말)이 준비되어 있으니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고 해야 한다.
서기 년 → 주후(전) 년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연도(年度)는 흔히 말하는 '서기'(西紀, 서력기원의 줄인 말)로서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을 뜻하는 영어의 B.C는 Before Christ의 약자로서'그리스도의 탄생 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기원후'를 뜻하는 A.D는 라틴어(고대 로마어)의 Anno Domini의 약자로서 ①'주님이 오신 후'② 또는'주님의 해로부터'의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옛날 우리 성경 찬송가에는 발행 연도를 적을 때 '구주강생 년'이라고 적었었다.
교회에서는'서기'라는 말 대신에'주전'(主前) 또는'주후'(主後) 라고 해야 한다.
할렐루야! - 조심하여 사용할 것
'할렐루야'(HALLELUYAH)는 히브리어 음역으로 할렐루(hallelu, 찬양하다)와 예호와(YHWH)의 단축형인 야(YAH)의 합성어로서 그 뜻은'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이다. 이 말은 주로 시편의 처음이나 마지막에 나오며 예배의식에 사용되었다(시 106: 48).
할렐루야는'예배'에서'하나님'을'찬양'하는'절정의 환호성'이다. 때문에 할렐루야를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말로 써서는 안 된다. 할렐루야는 사람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지 사람들끼리 하는 인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설교자가 설교도중에 아멘을 유도하기 위해'할렐루야!'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역시 합당하지 않다. 설교는 오직 말씀선포이다. 그리고 찬양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환호적 송축이다. 따라서 그 전개에 있어서 구분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선포될 때 감화감동을 받은 성도가 자발적으로'아멘'해야 그것이 정상이다.
설교도중에 할렐루야를 돌발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말씀의 선언적 측면에서 볼 때에도 맞지 않는다.
출석 확인할 때도 아멘 → 출석 확인할 때는 예
서약 할 때도 아멘 → 서약 할 때는 예
교회제직회 같은데서 출석을 확인할 때 참석자가 아멘으로 대답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잘못이다.
'아멘'이라는 말은'진실로 그러하다','참으로','확실히'의 뜻이다. 이 말은 주로 기도의 맨 끝에 쓴다(시 106: 48). 물론 기도 인도자와 함께 기도에 동참한 회중들도 기도를 마치면서 같이 아멘하고 말하게 된다. 이때의 아멘은'그렇게 공감합니다','진실로 그렇게 될 줄을 믿습니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쓰여 져야할 아멘을 출석을 확인하는데 마구 남용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기도 끝에'아멘'대신'예'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서약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서약을 할 때는 서약 내용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예'라고 대답해야 한다. 성경봉독 때 그 내용에 관계없이 무조건 아멘 하는 것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축원합니다
있기를 빕니다
누리기를 빕니다 → 있을 지어다.
축도문구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후 13장 13절의 성경 본문을 사용해왔다. 그러나 '있을지어다' 하는 문구가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말투라는 이유 때문에 여러 형태의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있을지어다'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이유는 이 문구가 명령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축원합니다', '있기를 빕니다', '누리기를 빕니다' 등 평서문 형식의 문구를 사용하고 있지만 썩 합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있을지어다'가 잘못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ㄹ지어다'는 문어투의 종결어미로서 '마땅히 그리하여라'의 뜻을 장중하고도 엄숙하게 나타낸 말이다.
2.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기원적인 성격을 띤' 명령이다.
3. 직접명령형이 아니라 간접명령형이다.
4.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있기를 빕니다, 누리기를 빕니다' 하는 문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굳이 '축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불필요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ㄹ지어다' 형식의 축도는 가장 바람직한 문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준비 찬송하겠습니다 → 찬송하겠습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영광과 사랑을 구체화하신 구속역사를 찬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찬송은 어느 곡이든지, 언제 부르든지, 어디서 부르든지 그것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런데'준비 찬송하겠습니다'하게 되면 그것은 찬송의 목적을'준비'로 한정하는 것이 된다. 찬송이 마치 시간을 메우기 위해 하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합당치 않다. 찬송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요 곡조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준비 찬송'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찬송의 목적이 변질 된다. 따라서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고자 할 때에는"예배를 시작하기에 앞서 찬송(몇곡)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다.
예배시간에는 복음성가보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복음성가는 예배의 의미보다는 신앙적 감성과 자기 치유적 기대심리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수석 부목사 → 선임 부목사
수석 장로 → 선임 장로
개혁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직분의 계급과 서열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수석'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모순이다.
수석(首席)이라는 말은'맨 윗자리'라는 뜻이고 그 반대말은 말석(末席)이다. 따라서'수석' 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서열을 매김 하여 계급화 하는 것이 되게 된다.
그러므로 수석 부목사, 수석 장로 등의 표현은 합당치 않다. 대신 선임 부목사, 선임 장로라고 해야 한다. 이때의 선임은 물론 임직의 선후를 따라 지칭한 것이다. 더러는 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고 사회적으로 지위와 명망이 잇는 장로를 임직 선후와 관계없이 수석 장로로 지명하는 사레가 없지 않으나 이것은 더더욱 부당한 것이다.
당회장 목사 → 담임 목사
교회의 주보나 게시판의 교회이름 밑에 당회장 목사라고 쓴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공예배 기도 때 당회장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당회장"은 노회에서 지교회의 치리권을 위임한 것으로 직무와 관련된 칭호이다. 예컨대 성례, 당회, 조직과 임면(任免), 법적 대표권과 직위표현, 회의의 사회와 결재, 교회 부속기관의 지도와 감독, 권징 등에 관한 사무 또는 정치적 법적 행위자로서 직무를 수행할 때 이 호칭을 쓰게 된다.
"담임 목사"는 목회 직무와 신분과 관련된 호칭이다. 그 교회의 목회를 책임진 사람이라는데 무게가 실려 있다. 예컨대 기도, 설교, 심방, 상담, 전도, 인도 등의 직무를 책임진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당회장은 행정적 경우에만 쓰는 것이 좋다. 그 외에는 담임 목사라고 함이 옳다.
담임 목사라도 부목사와 구분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우리 목사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웨스트민스트 사원 → 웨스트민스터 교회당
'웨스트민스터'는 영국에 있는 매우 훌륭하고 오래된교회당의 이름이다. 17세기에 150여명의 청교도들이 이 교회당에 모여(A.D. 1643년-1648년, 6년간) 작정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 권징조례)를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가 전수받아 따르고 있다.
사원(寺院)이라는 말은 불교의 절(사찰) 또는 회교의 모스크를 가리킨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전에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고 실었다. 그것을 한국의 출판사에서 일본사전을 그대로 옮겨 쓰다보니까'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창립기념 → 설립기념
'창립'이라는 말과 '설립'이라는 말은 의미가 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이 다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자.
창립 (학교나 회사, 기관 따위를) 처음으로 세움.
설립 (학교나 회사, 기관 따위의 단체나 기관을) 새로 세움.
'처음 세우는 것'과, '새로 세우는 것'은 개념이 다르다. '처음'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던 것을 세울 때 쓰이는 말이고, '새로'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헐어버리거나 혹은 다른 곳에 세우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어느 곳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질 때 '설립'이라고 해야 옳은가, 아니면 '창립'이라고 해도 괜찮은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어느 말을 쓴다해도 이해하는데 크게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려면 '설립'이라고 해야 한다.
최초에 주님께서 세운 교회가'창립'교회이다. 그 뒤에 세워진 교회는 모두가 '설립된'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가 세워진 날을 기념하는 날은 '창립기념일'이 아니라 '설립기념일'로 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평신도 → 성도
"집사님이세요?" 이런 질문에, "아니에요. 평신도예요." 하고 대답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요즈음 '평신도를 깨운다'느니, '평신도 훈련'이니 하여 '평신도'라는 말을 보편화하여 쓰고 있는데 과연 여기에 문제는 없는 것일까?
평신도라는 말은 주후 2세기 경 클레멘스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처음으로 장로, 집사, 평신도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성직자와 평교인을 갈라놓았는데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지금도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히 구분하고 있다.
교회에서 평신도의 위치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1954년 WCC 에반스턴 회의에서 제기되었으며 1958년 헨드릭 크래머가 'A Theology of Laity'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평신도신학'이라는 전문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평신도신학'은 성직자의 개념을 없앨 뿐 아니라 성직자를 평신도의 위치로 끌어내리려고 시도하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만인제사장설에 근거하여 기능상 직분자와 평교인을 구분하고 있을 뿐 계급상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굳이 평신도신학을 도입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평신도'란 말 자체가 성직자라는 개념과 구분을 지으려는 의도에서 생긴 말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표현은 아니라 하겠다. '평신도' 대신 그냥 '성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무난하지 않을까?
혹'일반성도'로 쓰자는 의견이 있으나'일반성도'는'특별성도'를 전제로 한 말이어서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다른 모든 성경은 장 절이라고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시편은 다르다. 시편의 경우는 몇 장, 몇 절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 편 절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편은 처음부터 각각 단편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전 → 예배당
사람들이 예배하러 가면서 성전에 간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배당(교회당) 간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구약시대에는 예배드리는 곳을 성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령께서 내주(內住)해 계시는 성도의 몸이'성전'이다.(고전 3: 16 고전 6: 19)
신약시대 성도들은 예배드리는 곳, 즉 장소로서의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우리의 몸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배 봐준다. → 함께 예배한다.
구역예배와 같은 때에 오늘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 봐주기로 했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예물을 드리며 말씀을 듣고 헌신과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나를 누가 대신해서 예배를 봐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배를 봐준다는 말 대신'함께 예배한다'라고 해야 한다.
다 같이 주기도문을 외우겠습니다. →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겠습니다.
'다같이 주기도문을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암송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주문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단순히 주기도문을 외우고 예배를 끝내서는 안 된다. 한 구절, 한 구절 뜻을 생각하며 간구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너무 빨리 끝내서도 안 되고, 무슨 모임이 끝났다는 표식처럼 되게 해서도 안 된다. 또'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해야 하는 대목에서 아직도'시험에 들지 말게 마옵시고'라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것도 고쳐야 한다. 사도신경 역시 진지하게 뜻을 생각하면서 신앙고백으로 토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기도 받는다. → 함께 기도한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 - 누구(어떤 사람)에게 받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보다 신앙적으로 앞서 있는 사람과 같이 기도하더라도 그것은 함께 기도하는 것이지 누구에게 기도를 받는 것은 아니다. 기도를 받는다는 말은 써서는 안 된다.
종님 → 종
더러 기도인도자 가운데 - 기도하면서"오늘도 주의 종님께서"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문법상'종'다음에'님'자를 붙이는 것은 모순이다. 그냥 종이라고 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우리를 종으로 표현한 곳이 여러 군데 있음을 보게 된다. 특별히 마 25: 14-31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 우리가'종'인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성경에 우리를 종이라고 한 것은 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해야 할 자라는 뜻이고 ② 모든 것(생명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③ 우리는 다만 맡은 자요 관리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데 있다.
<펌자료입니다>
'제단' 이나 '성전'이라는 말 대신에 예배당 또는 교회당이라고 해야 한다. 신약시대에는'제단'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구약시대에도 제단은 성전 뜰에 있었다. 구약은 성전제도로 말미암아 제단에서 번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등의 제사를 드렸다. 소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단번에 (히 10: 10) 영원한 제사(히 10 : 12)를 드리심으로 더 이상'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는 성전제도가 필요없게 되었다. 신약시대 성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다(요 4 : 24).
성서 → 성경
성경은 "성서"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성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요 5 : 39, 딤후 3 : 16).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신 문자 계시이고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다. '성서'라는 말에 이러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는 분해적이며 주석적이고 설명적인 내용을 문서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속(俗) 문자에 대한 대칭적인 종교 문헌적 총칭이다. 광의적으로 주석류와 설교문도 성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書(서)'는 ① 책 ② 글 ③ 편지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문자로 쓰여진 책이라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성령님께서는 글자 한 자 한 자 감동하시어서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시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글자 하나 하나가 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서는 신적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성경'과는 구분된다.
성경을 어원적으로 보면'기록된 문서'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의 '비블로스'에서'책'이라는 뜻을 가진'비블리아'가 유래되고 이로부터 영어의 '바이블'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바이블'을 거룩한 정경(正經, Canon)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성경은'영감'(유기적, 완전축자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딤후 3: 16, 벧후 1: 21) 무오하고(시 119: 140) 하고 불변하는(마 5: 18) 진리이다. 말씀을 사모하고 진리파수를 생명으로 하는 교회라면 반드시 '성서'대신에 '성경'이라고 해야 한다.
성가대 → 찬양대
성가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표현하는 노래이고, 성가를 예배에서 부르면 찬송 또는 찬양이다.
'찬양대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는 예배위원이다. 따라서 성가대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찬양대라고 불러야 한다. 성경(특히 시편)에도 보면 모두'찬양하라'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 전까지'찬양대'라고 불렀었다. 그러던 것이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 聖歌隊)를 그대로 직수입하여 표현한데서 영향을 받아 오늘날'성가대'라고 호칭하는 곳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고쳐져야 한다.
기도했습니다 → 기도합니다
시제상 "기도했습니다"는 과거형이고, "기도합니다"는 현재형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현재 시제(時制)로 해야 한다. "기도했습니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분명히 과거시제의 표현이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는 곧 '소원'이기 때문에 이 '소원'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이라야 한다. 기도를 끝낼 때'현재형'으로 말하게 되면 이는 간구한 내용에 대하여 계속 소원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기도의 종결을 나타내는 어미(語尾)는 '기도합니다' 또는 '기도드립니다'가 되어야 한다.
휘장분배 → 꽃 달아드리기
흔히'꽃을 달아드는 것'을 휘장분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휘장(徽章)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모자나 의복에 붙이는 표를 가리킨다. 그리고 분배(分配)는'고르게 나누어 준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 말 역시 축하받는 사람에게 적용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따라서 '꽃 달아 드리기'라고 순수한 우리말을 쓰는 것이 좋다.
축제 → 잔치
'찬양축제','체육축제','전야제'등의 표현은 옳지 않다.'축제'라는 단어 자체가 이방종교의'제사'또는 제의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도 보면 축제(祝祭)란,"축하하고 제사하는 것"을 말한다고 되어있다.
'축제'라는 말 대신에 '잔치', '대회', 또는 '축하행사'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찬양축제는 성가대회로, 체육축제는 체육대회로, 전야제는 전야잔치로 하는 것이 옳다.
당신 → 하나님 아버지 또는 주님
기도할 때 하나님을'당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당신은 존대어가 아니다.
우리말의 2인칭으로서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기도할 때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육신의 아버지께 '당신'이라고 하면 안 되지 않는가?
성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언제나 극존칭 화법을 써야한다. 당신이라는 말을, 말하는 주객(主客) 당사자가 어떤 제 3자를 3인칭 격으로 지칭할 때는 웃어른을 높여 일컫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하오"체의 예사 높임말인'당신'이라는 말을 하나님께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대명사로 당신이라고 호칭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관계적 극존칭을 써야한다.
운명하셨다 → 돌아가셨다
'타계하셨다'라든지'운명하셨다'는 말 대신에'돌아가셨다'라고 해야 한다. 타계(他界)라는 말은 불교 용어이다. 불교의 십계(十界) 가운데 인간계 이외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므로'돌아가셨다'라고 해야 한다.
'돌아가셨다'는 말이야말로 매우 성경적인 말이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 성경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생명이 다하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말이니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소천(召天)하셨다 또는 하늘나라 가셨다가 좋고 별세(別世)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별세보다 더 좋은 말은 돌아가셨다 이다.
'영결식'이라는 말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성경적이 아니고,'고별식'역시 작별을 고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장례식이라고 해야 한다.
'삼우제'(三虞祭)라고 하는 말 대신에'첫 성묘'(첫省墓)라고 해야 한다.
점심도 만찬 → 점심은 오찬
저녁도 만찬 → 저녁은 만찬
더러 '예배 후에 만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하는 광고를 들을 때가 있다. 점심때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점심을 드시고 가라는 말이 아니라 예배 마친 후 저녁때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식사를 드시고 가라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만찬(晩餐)은'저녁식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점심을 드시고 가시라고 하려면'예배 후에 오찬(午餐, 점심을 가리키는 말)이 준비되어 있으니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고 해야 한다.
서기 년 → 주후(전) 년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연도(年度)는 흔히 말하는 '서기'(西紀, 서력기원의 줄인 말)로서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을 뜻하는 영어의 B.C는 Before Christ의 약자로서'그리스도의 탄생 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기원후'를 뜻하는 A.D는 라틴어(고대 로마어)의 Anno Domini의 약자로서 ①'주님이 오신 후'② 또는'주님의 해로부터'의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옛날 우리 성경 찬송가에는 발행 연도를 적을 때 '구주강생 년'이라고 적었었다.
교회에서는'서기'라는 말 대신에'주전'(主前) 또는'주후'(主後) 라고 해야 한다.
할렐루야! - 조심하여 사용할 것
'할렐루야'(HALLELUYAH)는 히브리어 음역으로 할렐루(hallelu, 찬양하다)와 예호와(YHWH)의 단축형인 야(YAH)의 합성어로서 그 뜻은'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이다. 이 말은 주로 시편의 처음이나 마지막에 나오며 예배의식에 사용되었다(시 106: 48).
할렐루야는'예배'에서'하나님'을'찬양'하는'절정의 환호성'이다. 때문에 할렐루야를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말로 써서는 안 된다. 할렐루야는 사람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지 사람들끼리 하는 인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설교자가 설교도중에 아멘을 유도하기 위해'할렐루야!'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역시 합당하지 않다. 설교는 오직 말씀선포이다. 그리고 찬양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환호적 송축이다. 따라서 그 전개에 있어서 구분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선포될 때 감화감동을 받은 성도가 자발적으로'아멘'해야 그것이 정상이다.
설교도중에 할렐루야를 돌발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말씀의 선언적 측면에서 볼 때에도 맞지 않는다.
출석 확인할 때도 아멘 → 출석 확인할 때는 예
서약 할 때도 아멘 → 서약 할 때는 예
교회제직회 같은데서 출석을 확인할 때 참석자가 아멘으로 대답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잘못이다.
'아멘'이라는 말은'진실로 그러하다','참으로','확실히'의 뜻이다. 이 말은 주로 기도의 맨 끝에 쓴다(시 106: 48). 물론 기도 인도자와 함께 기도에 동참한 회중들도 기도를 마치면서 같이 아멘하고 말하게 된다. 이때의 아멘은'그렇게 공감합니다','진실로 그렇게 될 줄을 믿습니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쓰여 져야할 아멘을 출석을 확인하는데 마구 남용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기도 끝에'아멘'대신'예'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서약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서약을 할 때는 서약 내용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예'라고 대답해야 한다. 성경봉독 때 그 내용에 관계없이 무조건 아멘 하는 것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축원합니다
있기를 빕니다
누리기를 빕니다 → 있을 지어다.
축도문구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후 13장 13절의 성경 본문을 사용해왔다. 그러나 '있을지어다' 하는 문구가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말투라는 이유 때문에 여러 형태의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있을지어다'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이유는 이 문구가 명령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축원합니다', '있기를 빕니다', '누리기를 빕니다' 등 평서문 형식의 문구를 사용하고 있지만 썩 합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있을지어다'가 잘못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ㄹ지어다'는 문어투의 종결어미로서 '마땅히 그리하여라'의 뜻을 장중하고도 엄숙하게 나타낸 말이다.
2.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기원적인 성격을 띤' 명령이다.
3. 직접명령형이 아니라 간접명령형이다.
4.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있기를 빕니다, 누리기를 빕니다' 하는 문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굳이 '축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불필요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ㄹ지어다' 형식의 축도는 가장 바람직한 문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준비 찬송하겠습니다 → 찬송하겠습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영광과 사랑을 구체화하신 구속역사를 찬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찬송은 어느 곡이든지, 언제 부르든지, 어디서 부르든지 그것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런데'준비 찬송하겠습니다'하게 되면 그것은 찬송의 목적을'준비'로 한정하는 것이 된다. 찬송이 마치 시간을 메우기 위해 하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합당치 않다. 찬송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요 곡조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준비 찬송'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찬송의 목적이 변질 된다. 따라서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고자 할 때에는"예배를 시작하기에 앞서 찬송(몇곡)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다.
예배시간에는 복음성가보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복음성가는 예배의 의미보다는 신앙적 감성과 자기 치유적 기대심리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수석 부목사 → 선임 부목사
수석 장로 → 선임 장로
개혁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직분의 계급과 서열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수석'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모순이다.
수석(首席)이라는 말은'맨 윗자리'라는 뜻이고 그 반대말은 말석(末席)이다. 따라서'수석' 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서열을 매김 하여 계급화 하는 것이 되게 된다.
그러므로 수석 부목사, 수석 장로 등의 표현은 합당치 않다. 대신 선임 부목사, 선임 장로라고 해야 한다. 이때의 선임은 물론 임직의 선후를 따라 지칭한 것이다. 더러는 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고 사회적으로 지위와 명망이 잇는 장로를 임직 선후와 관계없이 수석 장로로 지명하는 사레가 없지 않으나 이것은 더더욱 부당한 것이다.
당회장 목사 → 담임 목사
교회의 주보나 게시판의 교회이름 밑에 당회장 목사라고 쓴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공예배 기도 때 당회장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당회장"은 노회에서 지교회의 치리권을 위임한 것으로 직무와 관련된 칭호이다. 예컨대 성례, 당회, 조직과 임면(任免), 법적 대표권과 직위표현, 회의의 사회와 결재, 교회 부속기관의 지도와 감독, 권징 등에 관한 사무 또는 정치적 법적 행위자로서 직무를 수행할 때 이 호칭을 쓰게 된다.
"담임 목사"는 목회 직무와 신분과 관련된 호칭이다. 그 교회의 목회를 책임진 사람이라는데 무게가 실려 있다. 예컨대 기도, 설교, 심방, 상담, 전도, 인도 등의 직무를 책임진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당회장은 행정적 경우에만 쓰는 것이 좋다. 그 외에는 담임 목사라고 함이 옳다.
담임 목사라도 부목사와 구분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우리 목사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웨스트민스트 사원 → 웨스트민스터 교회당
'웨스트민스터'는 영국에 있는 매우 훌륭하고 오래된교회당의 이름이다. 17세기에 150여명의 청교도들이 이 교회당에 모여(A.D. 1643년-1648년, 6년간) 작정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 권징조례)를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가 전수받아 따르고 있다.
사원(寺院)이라는 말은 불교의 절(사찰) 또는 회교의 모스크를 가리킨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전에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고 실었다. 그것을 한국의 출판사에서 일본사전을 그대로 옮겨 쓰다보니까'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창립기념 → 설립기념
'창립'이라는 말과 '설립'이라는 말은 의미가 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이 다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자.
창립 (학교나 회사, 기관 따위를) 처음으로 세움.
설립 (학교나 회사, 기관 따위의 단체나 기관을) 새로 세움.
'처음 세우는 것'과, '새로 세우는 것'은 개념이 다르다. '처음'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던 것을 세울 때 쓰이는 말이고, '새로'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헐어버리거나 혹은 다른 곳에 세우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어느 곳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질 때 '설립'이라고 해야 옳은가, 아니면 '창립'이라고 해도 괜찮은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어느 말을 쓴다해도 이해하는데 크게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려면 '설립'이라고 해야 한다.
최초에 주님께서 세운 교회가'창립'교회이다. 그 뒤에 세워진 교회는 모두가 '설립된'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가 세워진 날을 기념하는 날은 '창립기념일'이 아니라 '설립기념일'로 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평신도 → 성도
"집사님이세요?" 이런 질문에, "아니에요. 평신도예요." 하고 대답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요즈음 '평신도를 깨운다'느니, '평신도 훈련'이니 하여 '평신도'라는 말을 보편화하여 쓰고 있는데 과연 여기에 문제는 없는 것일까?
평신도라는 말은 주후 2세기 경 클레멘스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처음으로 장로, 집사, 평신도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성직자와 평교인을 갈라놓았는데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지금도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히 구분하고 있다.
교회에서 평신도의 위치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1954년 WCC 에반스턴 회의에서 제기되었으며 1958년 헨드릭 크래머가 'A Theology of Laity'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평신도신학'이라는 전문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평신도신학'은 성직자의 개념을 없앨 뿐 아니라 성직자를 평신도의 위치로 끌어내리려고 시도하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만인제사장설에 근거하여 기능상 직분자와 평교인을 구분하고 있을 뿐 계급상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굳이 평신도신학을 도입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평신도'란 말 자체가 성직자라는 개념과 구분을 지으려는 의도에서 생긴 말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표현은 아니라 하겠다. '평신도' 대신 그냥 '성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무난하지 않을까?
혹'일반성도'로 쓰자는 의견이 있으나'일반성도'는'특별성도'를 전제로 한 말이어서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다른 모든 성경은 장 절이라고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시편은 다르다. 시편의 경우는 몇 장, 몇 절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 편 절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편은 처음부터 각각 단편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전 → 예배당
사람들이 예배하러 가면서 성전에 간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배당(교회당) 간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구약시대에는 예배드리는 곳을 성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령께서 내주(內住)해 계시는 성도의 몸이'성전'이다.(고전 3: 16 고전 6: 19)
신약시대 성도들은 예배드리는 곳, 즉 장소로서의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우리의 몸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배 봐준다. → 함께 예배한다.
구역예배와 같은 때에 오늘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 봐주기로 했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예물을 드리며 말씀을 듣고 헌신과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나를 누가 대신해서 예배를 봐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배를 봐준다는 말 대신'함께 예배한다'라고 해야 한다.
다 같이 주기도문을 외우겠습니다. →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겠습니다.
'다같이 주기도문을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암송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주문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단순히 주기도문을 외우고 예배를 끝내서는 안 된다. 한 구절, 한 구절 뜻을 생각하며 간구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너무 빨리 끝내서도 안 되고, 무슨 모임이 끝났다는 표식처럼 되게 해서도 안 된다. 또'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해야 하는 대목에서 아직도'시험에 들지 말게 마옵시고'라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것도 고쳐야 한다. 사도신경 역시 진지하게 뜻을 생각하면서 신앙고백으로 토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기도 받는다. → 함께 기도한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 - 누구(어떤 사람)에게 받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보다 신앙적으로 앞서 있는 사람과 같이 기도하더라도 그것은 함께 기도하는 것이지 누구에게 기도를 받는 것은 아니다. 기도를 받는다는 말은 써서는 안 된다.
종님 → 종
더러 기도인도자 가운데 - 기도하면서"오늘도 주의 종님께서"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문법상'종'다음에'님'자를 붙이는 것은 모순이다. 그냥 종이라고 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우리를 종으로 표현한 곳이 여러 군데 있음을 보게 된다. 특별히 마 25: 14-31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 우리가'종'인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성경에 우리를 종이라고 한 것은 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해야 할 자라는 뜻이고 ② 모든 것(생명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③ 우리는 다만 맡은 자요 관리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데 있다.
<펌자료입니다>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yes24 원글보기
메모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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