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대 왕릉 [1]
조선의 왕릉의 개요
조선시대 묘제를 보면 왕실의 묘는 능, 원, 묘로 엄격한 구분이 되어 있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왕의 사친, 왕세자와 그 비의 무덤, 묘는 대군.공주.옹주.후궁.귀인 등의 무덤으로 위계에 따라 그 명칭을 다르게 하였다. 조선시대의 능은 서울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 현재 조선왕조의 무덤들은 모두 109기에 이른다. 능 44기, 원 13기, 묘 52기가 남아 있다.
왕이 승하하면 이조에서는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을 설치하고 그 직무를 정한다. 빈전도감은 승하한 임금의 옥체에 관한 지밀한 직무를 맡는다. 소렴, 대렴 때에 필요한 수의와 홑이불 등 각종 물품들을 준비한다.
국장도감은 관과 상여 등에 해당되는 재궁, 거여 그리고 부장품들을 준비하여 주요 임무는 무엇보다도 궁궐에서 왕릉까지 이르는 발인 행렬을 책임지는 것이다. 구성 직책으로 예조판서와 호조판서 그리고 기술관리청인 선공감과 네 명의 당하관에 기술직 관원들을 두었다.
산릉도감은 왕릉 현장에서 토목공사, 석물 조성과 건축물 조영 등 가장 힘든 역사를 담당하던 기관이다. 이렇게 설치된 빈전 , 국장, 산릉도감의 우두머리들을 제조라 하여 빈전도감제조, 국장도감제조, 산릉도감제조라 칭했고, 세 명의 제조들을 총괄.관장하는 총호사는 주로 좌의정이 맡았다.
조선시대 왕릉의 택지는 고려시대부터 성행하여 온 풍수지리설에 따라 상지관이 추천하면, 왕이 친히 현지에 나아가 지세를 살피고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명당이란 배산임수의 지형에 영험한 맥이 흐르다 멈추는 곳이라고 한다. 북쪽의 높은 산을 주산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있고, 남쪽에 안산, 묘역 안에 천이 있어 물이 동쪽으로 흘러 모아지는 곳이다. 이 묘역 안의 명당에 지맥이 닿아 생기가 집중되는 곳을 혈이라 하는데, 이 혈에 관을 묻고 봉분을 조성했다.
능은 또한 좌향 (坐向)을 중요시 하였는데, 좌란 혈의 중심이 되는 곳이고, 좌의 정면이 되는 방향이 향(向)이다. 능의 뒤쪽에는 배산이 있고, 경사지 밑부분에 동.서.북 3면으로 곡장을 두르고 곡장 안에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 밑으로는 12각의 호석을 둘러 봉분을 보호했는데, 이를 병풍석이라 한다. 병풍석은 지대석 위에 우석을 놓고 사이사이에 면석 12기를 세웠는데, 면석에는 중앙에 12방위를 담당하는 십이지신상을 해당 방위에 맞게 양각하였다. 이 십이지신상은 모든 방위의 외침으로부터 왕릉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병풍석이 감싸고 있는 봉분의 주위는 다시 난간석으로 둘러 보호했다. 난간석은 망주석 모양의 제일 높은 기둥인 석주, 그 사이를 가로질러 접근을 막는 죽석, 죽석의 중간에 받쳐둔 작은 기둥인 동자석주로 구분되었다.
난간석 바깥으로는 석양 4기를 동서로 나누어 세우고, 석호 4기를 북쪽에 2기, 동.서의 석양 사이에 하나씩 두어 봉분 밖을 향하게 하였다. 석호는 능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다. 추존된 왕릉의 경우 석호와 석양의 수를 반으로 줄여 일반 왕릉과 차등을 두었다.
봉분 바로 앞에는 상석을 두었다 . 상석 아래에는 귀면 모양을 새긴 고석이 상석을 받치고 있는데, 험상궂은 얼굴을 한 귀면 중에는 4개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을 세웠고, 이보다 한 단 아래에 장명등을 세웠다. 장명등은 초기에는 팔각 지붕을 하고 있다가 차츰 사각형 지붕으로 변하였다. 장명등 아래에는 양쪽에 문인석 하나씩과 석마 한필씩 각각 세웠고, 그 아래에는 무인석 1쌍과 석마 한필씩 세웠다.
봉분 정남 산기슭에는 정자각을 조성하였다. 정자각은 제향을 준비하는 건물이었다. 정자각에 오르는 층계는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이는 동입서출의 뜻이 있다. 정자각 뒤 서쪽 제향 후에 축문을 태워 묻는 방형의 석함을 만들었는데, 이를 예감이라 하였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비각을 세웠고, 비각의 아래에는 수복방을 두었다.
정자각 뒤쪽으로는 작은 동산 모양을 흙더미로 조성한 강(岡)이 있다. 강은 사초지라고도 부르며, 사초지 위에 오르면 장대석이 놓여 있는데, 강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또한 정자각 정면으로 참도가 깔려 있고,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세워졌다. 후대의 왕들이 제사를 지내러 능에 연을 타고 올 때에도 홍살문에서 땅에 내려 오른쪽에 있는 배위에서 절을 하고 능으로 들어갔다. 홍살문 밖 능역에 있는 재실에는 참봉이 능의 수호관리를 위하여 상주하였다.
능의 형식은 분묘의 조성형태에 따라 보통 단릉 , 쌍릉, 삼연릉, 동원이강릉, 합장릉으로 나뉘어진다. 단릉은 왕이나 왕비 중 어느 한 분만을 매장하여 봉분이 하나인 능을 말하고, 상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 봉분이 나란히 2기로 조성된 능을 말한다. 삼연릉은 왕.왕비.계비 등 봉분 3기를 나란히 조성한 능을 말하고, 동원이강릉은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 각 배후 좌우 두 언덕에 각기 한 기씩 조성한 능을 말하며, 합장릉은 왕과 왕비의관을 함께 매장하여 한 개의 봉분으로 조성한 능을 말한다.
원과 묘의 경우에는 봉분 , 곡장, 상석, 정자각, 재실 등 대부분 능과 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으나 왕릉보다 규모가 작고 봉분 밑에 병풍석과 난간석, 무인석이 생략되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제1대 太祖(태조) - 건원릉(建元陵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健元陵의 특징 :
조선조(朝鮮朝)의 건국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 재위7년)의 건원릉은 전형적인 조선조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이후 왕릉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북동서 방면 3면(面)의 곡장(曲墻) 안에 단릉(單陵)의 봉분(封墳) 형식으로 봉분 앞 중앙에 상석과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고 양 옆에는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단 아래의 좌우에 문인석(文人石)이 뒤에 석마(石馬)를 대동하고 있고, 그 아래 단에 역시 좌우로 무인석(武人石)이 석마(石馬)를 뒤에 거느리고 있어 왕릉의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본래 이와 같은 능의 상설 제도는 고려(高麗)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을 기본으로 삼아 설치한 것입니다. 또한 건원릉에는 홍살문(紅살門) 안쪽 정자각 우측 비각(碑閣) 안에 태조의 업적과 명복을 비는 신도비(神道碑)를 함께 세우고 있습니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종의 헌릉(獻陵)에도 있습니다. |
제2대 定宗(정종) - 후릉(厚陵)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북한 소재) 사 적 : 북한 소재로 사적 미지정
厚陵의 특징 :
定宗(이방과: 1357-1419 , 재위 2년, 상왕 20년)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定安王后 金氏: 1355-1412)의 후릉은 조선 최초로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나란하게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지역에 소재하고 있어 자세한 경관은 볼 수 없지만 북한에서 발간된 사진으로 볼 때 많은 풍화(風化)와 소실된 모습에서 우리의 문화 유산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
제3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 헌릉(獻陵)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내곡동 산13 <獻仁陵 소재> 사 적 : 제 194 호
獻陵의 특징 :
태종(이방원 :1367-1422 : 재위 18년, 상왕 4년)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1365-1420)의 쌍릉(雙陵) 형태의 헌릉(獻陵)은 창업수성(創業守成)의 업적인 조선 개국(開國)과 왕실의 기반을 공고하게 만든 태종의 치적답게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형식을 따른 헌릉은 원경왕후 승하 후 태종의 명으로 조성되었으며, 건원릉과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같은 경내(境內)에 23대 순조(純祖)의 인릉(仁陵)이 함께 모셔져 '헌인릉(獻仁陵)'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
제4대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 영릉(英陵)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 사 적 : 제 195 호
英陵의 특징 :
세종(이도:1397-1450, 재위32년)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1395-1446)의 영릉은 본래 소헌왕후 승하{세종 28년} 후 태종의 헌릉(獻陵) 영내에 하나의 봉분(封墳)에 석실(石室)을 둘로 하는 합장(合葬) 형태의 동릉이실(同陵異室)로 조성하고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조(世祖) 대에 천장(遷葬)의 논의를 하고 결국 예종(睿宗) 1년(1469년)에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하여 단릉(單陵)의 합장(合葬) 형태로 만들었는데, 세조(世祖)의 광릉(光陵) 제도를 따라 석실(石室)과 병풍석(屛風石)은 쓰지 않았습니다. 초기 영릉의 석조물(石造物)들은 그대로 매장(埋葬)되었는데, 이 때 신도비(神道碑)도 함께 묻고는 여주의 새 능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임금의 자취는 국사(國事)에 실려 있기 때문이라 했고, 이는 5대 문종(文宗) 때부터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던 일로 인한 것입니다. 영릉의 능원(陵原) 구조는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상석(床石)이 두 개 놓여 합장릉(合葬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자각(丁字閣) 왼쪽에는 수라간(水刺間)이 있어 제사 때에 제물(祭物)을 준비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아울러 바로 인접한 곳에 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를 모신 영릉(寧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제5대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 현릉(顯陵)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顯陵의 특징 :
문종(이향(李珦):1414-1452, 재위 2년)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1418-1441)의 현릉은 홍살문(紅--門)부터 모든 부속시설은 하나씩만 설치되어 있고 좌우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따로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종의 릉은 웅장하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까지 두르고 있지만, 현덕왕후릉은 다소 치우쳐 보입니다.
그 이유는 본래 현덕왕후가 세자빈 때(1441년: 세종23년) 단종(端宗)을 출산하고 승하해서 문종(文宗) 즉위년[1450년]에 현덕왕후로 추숭되어 소릉(昭陵)으로 명명되었다가 단종 즉위년[1452년]에 문종과 합장(合葬)되면서 합장릉으로 현릉(顯陵)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조(世祖) 3년[1457년]에 현덕왕후의 집안이 동생이 단종의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현덕왕후의 능이 파헤쳐져 세가로 옮겨졌다가 중종(中宗) 8년[1513년]에 복위되어 다시 동원이강릉의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제6대 단종(端宗) - 장릉(莊陵)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21 사 적 : 제 196 호
莊陵의 특징 :
단종(이홍위(李弘暐) : 1441-1457, 재위 3년)의 장릉은 비운의 소년 임금 능답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조성되었습니다. 영월로의 유배생활에서 서인(庶人)으로까지 강등되어 사약(賜藥)을 받고 생을 마감한 단종은 영월 야산에 암매장되었던 것을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와서야 묘를 찾아 봉분(封墳)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뒤 240년이 지난 숙종(肅宗) 24년(1698년)에 복위(復位)되어 단종(端宗)으로 묘호(廟號)를 붙이고 종묘(宗廟)에 부묘하고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습니다. 추봉된 능의 예를 따라 난간석(欄干石)과 무인석(武人石)은 설치하지 않았고 양식 또한 가장 간단하게 조성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했습니다. |
제7대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 - 광릉(光陵)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7 사 적 : 제 197 호
光陵의 특징 :
세조(이유 : 1417-1468, 재위 14년)와 왕비(王妃)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 1418-1483)의 광릉(光陵)은 조선조 내내 풀 한 포기의 채취도 금지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울창한 산림을 자랑합니다. 주위의 수목원을 떠올리면 되겠지요.
정자각(丁字閣)을 중심으로 좌우 언덕에 세조의 능과 정희왕후의 능이 각각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간략한 의례로 백성들의 노동을 줄여야 한다는 세조의 유언대로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았고, 석실(石室)과 석곽(石槨)도 사용하지 않고 회격(灰隔: 관(棺)과 광중(廣中)사이를 석회(石灰)로 다짐)으로 석실, 석곽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정희왕후 승하 후 세조의 능과 다른 언덕에 왕후릉을 조성하면서 신하들의 의견이 능호(陵號)를 달리할 것인가, 정자각(丁字閣)을 새로 세울 것인가 등으로 분분하다가 성종(成宗)이 먼저 건립한 세조릉의 정자각을 두 언덕 사이로 옮겨지어 함께 제사 지내도록 함으로 인해 광릉(光陵)의 단독 능호(陵號)를 유지하게 됩니다. 광릉 근처 능안마을의 봉선사(奉先寺)는 정희왕후 명으로 중건된 세조의 명복을 빌었던 광릉의 원찰(願刹)입니다. |
제8대 예종(睿宗)과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 창릉(昌陵)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30 <서오릉(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7 호
昌陵의 특징 :
일반인에게 비공개 능인 창릉(昌陵)은 단명 임금 예종(이황(李晄) : 1450-1469, 재위 14개월)과 계비(繼妃)인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 ?-1498)의 능으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을 취하고 석물(石物)의 배치는 {국조오례의(國祖五禮儀)}의 전통적인 예를 따르고 있습니다.
睿宗의 비(妃) 장순왕후(章順王后) - 공릉(恭陵)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恭陵의 특징 :
예종(睿宗)의 비(妃)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 1445-1461)의 공릉(恭陵)은 세자빈(世子嬪) 때 승하했기 때문에 세자빈묘로 조성되어 봉분(封墳)의 난간석(欄干石)과 병풍석(屛風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생략되어 간략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후에 성종(成宗) 1년(1470년)에 공릉(恭陵)으로 명명되고 장순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주변에 장순왕후와 자매간인 성종(成宗)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순릉(順陵)과 영조(英祖)의 장자(長子) 효장세자(孝章世子 : 추존-진종(眞宗))와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영릉(永陵)이 있어 공순영릉(恭順永陵)으로도 불립니다. |
제9대 성종(成宗)과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 선릉(宣陵)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5-4 <宣靖陵 소재> 사 적 : 제 199 호
宣陵의 특징 :
세조의 손자이고 추존(追尊)된 덕종(德宗)의 차남인 成宗(이혈 : 1457-1494, 재위 25년)과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 1462-1530)의 선릉(宣陵)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성종의 능에는 검약(儉約)해야 한다는 세조(世祖)의 명과 다르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한 것이 특이합니다. 후에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이 그의 두 번째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선릉의 경내로 옮겨져 선정릉(宣靖陵)의 명칭으로 불리는데, 중종의 정릉(靖陵)이 조성될 때 성종의 선릉이 그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成宗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 - 순릉(純陵)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純陵의 특징 :
성종의 비(妃)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 1456-1474)의 순릉(純陵)은 왕비 책봉 5년만에 슬하에 자식 없이 19살의 나이로 승하[성종 6년]해 언니인 장순왕후(章順王后 - 예종의 비) 공릉(恭陵)과 나란하게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순릉(純陵)이라 명명되어 자리잡게 됩니다. 당시 풍습대로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은 없고 모든 부속물들은 정갈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
제10대 연산군(燕山君)과 부인신씨(夫人愼氏)- 연산군묘(燕山君墓)
소재지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5 사 적 : 제 362 호
燕山君墓의 특징 :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폐왕(廢王)인 연산군(이융; 1476-1506, 재위12년)과 폐비(廢妃) 부인 신씨(愼氏;?-1537)의 연산군묘는 유배지 강화도 교동(喬桐)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한 연산군을 그곳에 매장했다가, 1512년(중종 7년)에 폐비 부인 신씨의 상언(上言)으로 양주군(楊州郡) 해촌(海村)-{현재의 위치}에 이장(移葬)하여 왕자군(王子君)의 예우로 개장(改葬)했습니다. 그 후 1537년(중종 32년)에 부인 신씨가 사망하자 쌍분(雙墳)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왕자군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만으로 조촐하게 설치했지만, 그 보다는 폐위된 왕이었기에 봉분 앞의 비석 전면의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비명을 보면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
제11대 중종(中宗) - 정릉(靖陵)
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5-4 <宣靖陵 소재> 사 적 : 제 199 호
靖陵의 특징 :
중종(이역;1488-1544, 재위39년)의 정릉이 현 위치인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에 인접한 곳에 위치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습니다. 또한 왕비(王妃)가 3명이나 되었으면서도 같은 곳에 능이 조성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 번째 왕비였던 명종(明宗)의 생모(生母)인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때문입니다. 처음 중종 승하 후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능인 희릉(禧陵;서삼릉 소재) 옆에 조성되었으나, 1562년[명종 17년]에 당시 권력을 움직였던 문정왕후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진 것입니다. 겉으로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따라 옮겼다고 했지만, 오히려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沈水)되었기에 결국 중종의 옆에 같이 잠들고 싶었던 문정왕후는 자신의 능을 다른 곳{태릉}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중종의 정릉(靖陵)을 잘못 옮김으로 인해 그 다음 해에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서거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 자신, 또 2년 뒤에는 명종(明宗)이 승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倭賊)에게 도굴까지 당하게 되는 비운의 능이 됩니다. 능역의 양식은 함께 있는 성종의 선릉(宣陵) 양식을 따라 웅장하게 조성되어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 문양까지 조각했습니다. |
제12대 인종(仁宗)과 인성왕후(仁聖王后) - 효릉(孝陵)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孝陵의 특징 :
조선조 최단명 왕위에 있었던 仁宗(이호; 1515-1545, 재위 8개월)과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 1514-1577)의 효릉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 인종(仁宗)의 능을 먼저 단촐하게 조성했다가, 인성왕후 승하[선조 10년] 후에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재 조성할 때 인종(仁宗)의 능에는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인성왕후 능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난간석(欄干石)으로 두 능을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비공개 능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제13대 명종(明宗)과 인순왕후(仁順王后) - 강릉(康陵)
소재지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233-19 사 적 : 제 201 호
康陵의 특징 :
明宗(이환; 1534-1567, 재위 22년)과 비(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의 강릉은 현재 원형보존을 위해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의 태릉(泰陵)과 함께 능 위치나 의미에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능이라면 태릉 입구에라도 강릉(康陵)에 대한 보다 자세한 안내나 설명이 아쉽습니다. 왕과 왕비의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두 능의 봉분에는 모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난간석(欄干石)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좌우측 무인석(武人石)의 외형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입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선조 4년[1571년]에 강릉(康陵)의 정자각(丁字閣)에 화재가 나자 임금과 세자가 의복을 갈아입고 풍악(風樂)을 금하며 반찬 수를 줄이는 등 근신(謹愼)의 예를 다했다고 합니다. |
제14대 선조(宣祖)와 비(妃) 의인왕후(懿仁王后),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 목릉(穆陵)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穆陵의 특징 :
宣祖(이균; 1552-1608, 재위 41년)와 비(妃)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1600), 계비(繼妃)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 1584-1632)의 목릉은 세 개의 능이 왼쪽부터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순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에서 변형된 형태로 조성되었고, 동구릉(東九陵)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 수목보호를 위해 관람을 제한해서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선조의 능은 봉분(封墳)에 구름 문양[운채(雲彩)]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된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되어 있고 난간석(欄干石)과 기타 석물(石物)들이 전통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전란(戰亂)의 폐해(弊害) 후에 제작되어서 그런지 조형미(造形美)는 떨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선조의 목릉은 건원릉 서쪽 산기슭에 정해졌는데, 불길(不吉)하고 습기가 있다는 원주목사(原州牧使)의 상소로 위치를 이동해 현 위치에 의인왕후릉과 함께 자리잡습니다.
두 번째 의인왕후릉은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이 설치되었고 특이한 점은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의 줄기에 꽃무늬[화문(花紋)]가 처음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후 후대(後代)의 능까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의인왕후릉 역시 처음에는 경기도 포천 지역에 유릉(裕陵)이라 묘호를 정해 조성했다가, 선조의 능과 함께 현 위치로 옮겨와 모시게 됩니다.
세 번째 인목왕후능은 앞의 두 능에 비해 조금 뒤에 조성되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조형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에는 역시 병풍석(屛風石)은 생략되었고 난간석(欄干石)만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의인왕후 약사(略史)> 1555년[명종 10년]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로 태어난 의인왕후는 1569년에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행하였고 소생(所生)이 없이 1600년(선조 33년) 46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해 재론 끝에 건원릉(健元陵) 동쪽 목릉(穆陵)의 세 능 가운데 첫 번째로 안장되었습니다.
<인목왕후 약사(略史)> 인조대(仁祖代)까지 생존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칭이 친근한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繼妃)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584년(선조 17년)에 태어났습니다. 1602년 선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1606년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으나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에 영창대군과 김제남은 피살되고 인목대비 역시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복위하여 왕대비에 오르게 되고 1632년(인조 10년) 48세의 나이로 승하해 목릉(穆陵)의 세 번째 능으로 안장되었습니다. 인목왕후는 글씨에도 능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인목왕후의 어필(御筆)인 [보문경(普門經)] 일부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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