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은 왜 방랑시인이 되었나
선생은 안동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조는 선천부사 익순이고 부 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의 이남이다. 순조 12년 임신(1812)선생 육세 때 조부 익순이 홍경래란에 관련되어 3월 9일 복주(伏誅)되자 연루(連累)를 피하여 황해도 곡산에서 숨어 자랐다. (익순은 고종 정유년에 신원(伸寃)되고 순종 무신에 복작(復爵)되다) 그 후 익순에 대한 문죄는 본인에 국한하기로 한 조정 결정이 알려져서 선생은 모친과 함께 곡산을 떠나 광주,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 삼옥에 정착하였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선생은 20세 때 영월도호부 동헌 백일장에서 조부를 지탄한 죄책으로 번민 끝에 궁벽(窮僻)한 산협(山峽)인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으며 김삿갓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선생은 57세로 운명할 때까지 전국을 두루 유랑하였으며 인간사 모든 것을 시제로 낙운성시(落韻成詩)하였다. 또한 선생의 과시는 후세 과거 지망자들의 교범으로 쓰였을 뿐더러 특히 평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읊어 빛나는 서민문학을 남기었다.
1962년 10월 17일 세상에서 잊혔던 선생의 묘소를 박영국은 김영배, 이상기등의 증언으로 이곳에서 찾아내었다.
난고의 대나무 시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대로 맡기리라.
손님 접대는 집안 형세대로
시장에서 사고팔기는 세월대로
만사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竹詩 죽시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차죽피죽화거죽 풍타지죽랑타죽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竹 반반죽죽생차죽 시시비비부피죽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빈객접대가세죽 시정매매세월죽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만사불여오심죽 연연연세과연죽
<영월에 있는 김삿갓문학관 전경>
<문학관은 아담하지만 그의 체취가 여기저기 물씬 묻어 있는 장이다>
<지난 10월 24일 문지회 영월 답사시 김삿갓문학관에서 안내를 받은 장면, 안내자가 김삿갓 모습으로 분장하고 해학이 넘치는 재담으로 멋지게 해 주었다>
<부근 가게에도 김삿갓과 연관된 상품이 널려있다>
<김삿갓 묘소에도 각종 조형물과 그의 시로 장식되어 있다>
<난고 김병연의 묘소>
여기서 과연 당시 내가 난고였다면 미쳐 모르고 조부를 비난한 죄값을 치르기 위해 방랑객이 되어 일생을 참회의 �으로 살 수 있었겠는냐 하는 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기는 커녕 다 남탓으로 돌리는 세태를 보면서 그는 분명 후손들에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진정한 선비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영월은 단종의 한많은 생애와 그를 복위시키려던 수많은 충신들과 진정한 선비 김삿갓을 만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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