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지킴이

(벤처)3조 두류산금용사의 유래에 대하여

mose 2019. 7. 2. 00:14

(벤처)3조 두류산금용사의 유래에 대하여

* 2019.7.1(월) 초여름의 날씨이긴 하지만 (3조)사공활동참여자들의 연수장소로 적격지인 성당못 서쪽 편에 위치한 비가 내려도 무더운 날일 때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하는 장소에서 지난 주 6월 28일에 가 보았던 두류수영장 뒤편에 있는 두류산 금용사의 유래에 대하여 좀더 깊이 있게 알고 어느 날 시민들에게 해설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자유롭게 토의형식으로 김병철 조장 중심으로 7월 첫주 첫날 사공활동을 실시하였다.

* 6월28일(금) 사회공헌활동3조 회원들이 김병철 조장을 중심으로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산 198-10번지에 있는 두류산 금용사절 입구 계단과 문만이 동쪽으로 약간 치우져 세워져 있는 대문을 통해 스님들께서 수행정진을 하고 계시는 곳, 깨끗한 절집 대웅전 동북쪽에 놓인 삼성각 내부를 둘러보았다.

김병철 조장이 준비해 온 음료수와 빵을 먹으며 자유롭개 자체연수를 실시하였다


      ▼ 아래는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준비한 유인물을 읽으며 두류산 금용사 창건유래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보는 시간을 갖었다.      

   

    조장 김병철

고려 중기에 한 부호가 문중의 원찰로 금봉산(두류산)에 절을 짓고, 금봉사(金鳳寺)라 했다.

1926(병인년)김송동 보살님이 지금의 두류실내수영장 별관자리에 대웅전과 요사2동을 창건하였다. 1986년 대구에서 개최한 전국체전 때 현 주지 혜선스님이 금용사의 부지가 실내수영장으로 편입되면서, 현 위치로 이전하여 중창함.

절 이름을 금용사라 한 것은 옛날 천재지변으로 금봉산 봉황이 용으로 화했다는 풍수설화를 감안하여 금()자는 옛 금봉사에서 따오고, ()자는 천재지변의 풍수설화에서 딴 것이라 한다.

 

  

 

김 성

금용사 창건유래 창건년대 : 고려시대(문헌적 고증은 어려우나 구전되어 오는 전설과 이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와 와당의 생활 흔적 등으로) 이 곳에 전래 된 지명과 유래를 살펴보면 두류산은 한때 금봉산으로 불렸으며 고려중기에 한 부호가 몽고의 관습을 피해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솔권한 문중의 원찰로 절을 짓고 그 이름을 풍수적 지형지세를 따라 金鳳寺라고 했다고 한다.

  

  신 중 식

금용사 창건유래 이렇게 존속하여 오던 절이 조선의 개국과 함께 숭유억불의 정책이 시작되면서 지방 유생 토호들이 절을 헐고 향교를 지으려고 하자 천재지변이 일어나 산이 갈라지고 절터가 못이 되었다고 한다.

  

 김  상  기

금용사 창건유래 이렇게 없어진 금봉사는 역사의 망각 속에 사라지고 오랜 세월 속에 잊혀져 오다가 이곳 인근에서 불심이 돈독한 김송동(金松東) 보살님이 절을 창건하기 위해 부지를 물색하던 중 성당못 주변에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면 파불조각과 토기 와당 전돌 등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원찰을 세울 것을 발원하여 1926(병인년)에 지금의 두류실내수영장 별관 자리에 대웅전과 요사2동을 창건하였으며 이때 출가하여 본심(本心)스님으로 평생동안 이 도량에서 정진하셨다고 한다.

  

  김 기 홍

금용사 창건유래 절 이름이 금용사라고 한 것은 옛날 천재지변으로 금봉산 봉황이 으로 화했다는 풍수설화를 감안하여 금()자는 옛 금봉사에서 따오고, ()자는 천재지변의 풍수설화에서 따서 오늘에 금룡사의 절 이름이 있게 되었다. 지금의 금룡사는 1986년 대구에서 개최한 전국체전 때 현 주지(慧禪)스님께서, 금룡사 부지가 실내수영장으로 편입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현 위치로 이전 중창하셨다.

  

안 두 환

금용사 창건유래 금봉산에 금봉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터가 못으로 변했고 세월이 흘러 이 못 주변에 다시 절을 세워 금용사라 칭했는데 최근 들어 수영장이 들어서면서 또 다시 현재의 절집자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봉황이 용으로 바뀌고..절집이 물 때문에 두 번 이사를 했다. 물론 구전되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뭔가 비밀이 있을 것이다

  

  최 진 택

금용사 창건유래 봉황과 용, 물과 두 번의 이사이 곳 금용사에서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좌청룡, 우백호 하는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자락이 우측에서 내려와 앞쪽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길게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이다. 풍수에선 이런 터를 남자와는 인연이 없는 터로 본다. 여자들에게 발복發福을 주는 터라는 점이다. 그래서 금용사는 비구니 사찰인게 더 유리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박 정 순

금용사 창건유래 지금은 일반적으로 두류산으로 부르고 있지만 과거에는 지금의 성당못과 문화예술회관쪽의 산을 금봉산이라 칭했고 우방랜드쪽의 산을 두류산이라 불렀다..

  

 장 순 자

금용사 창건유래 실제로 이 곳 금봉산은 금용사 유래에서도 나왔지만 명당으로 경쟁이 치열했던 곳이다. 조선조 이 곳은 명문세가였던 채씨와 남씨가문의 세거지였는데 이 지역에 왕기王氣가 서렸다하여 4번 독산 쪽에 철퇴를 가해 왕기를 끊었다고 전해지고 있디. 성당동聖堂洞이란 이름도 성스러운 지역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만 조

금용사 창건유래 두류산은 용머리에 해당하는 우방랜드 쪽으로 대로가 나면서 용맥이 끊어진 것도 서러운데 용머리에 해당하는 용두에다 우방타워까지 박아두었으니. 금용사는 바로 이 두 지점의 사이에 앉아 있는 셈이다. 독산쪽은 철퇴를 맞아 뻗고, 용두봉쪽은 타워라는 철심이 박혀 뻗고 이 손상된 두 지역의 가운데 지점에 앉아 있는 금용사. 봉황은 이 곳을 떠났을 것이다.

  

김 홍 렬

금용사 창건유래 그렇다면 용은 있다. 용은 水神이다. 금봉사에서 봉자가 빠지고 용자가 들어간 것은 바로 두 번이나 물(, 수영장) 때문에 이사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주문이 도심속에 있는 산사. "두류산 금용사" 라는 현판이 눈에 돋보인다.

  

 박 춘 열

금용사 창건유래 보통의 일주문에는 대문이 없는데 금용사의 일주문에는 대문이 달려 있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6층 석탑이 았고 바로 뒤에 금용사 대웅전이 있다. 보통의 사찰에는 대웅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지만 이곳은 일주문. , 대웅전 순으로 바로 붙어 있다.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전경 너무나도 좋다. 금용사는 1931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계속적인 보수 및 신설로 고풍스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리 승 주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릴 때도 바람이 불어도 무더운 여름날에도 시민들에게 가장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두류공원. 그 공원내에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가벼운 산책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금용사 같은 사찰도 드물 것이다.

두류산 금용사가 바로 그런 곳이다.

♠ 7월 1일 지방에 따라서는 비가 내리다는 소식이 있지만 여기 대구 달서구 성당못 주변에는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내는 모양만 보아도 쉬원해지는 기분이다. 많은 시민들이 성당못 부변 산책로를 따라 걷기도 하며 시원 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참 좋은 자연속에서 무더운 여름날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