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지킴이

성당못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대구지역의 도시개발로 없어진 못들

mose 2019. 7. 6. 10:02

성당못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대구지역의 도시개발로 없어진 못들==

* 지난 4월부터 (벤처)3조 사회공헌활동에 참여하면서 대구지역의 조상의 덕과 혼이 깃든 곳 월곡역사박물관, 2만년을 이어온 선사시대로의 탐방을 하면서 진천동 입석선사유적공원과 고인돌(지석묘), 대천동 청동기유적(한샘공원)과 월암동 청동기유적(선돌공원), 월성동 구석기유적(조암공원), 상인동 고인돌(지석묘)와 청동기유적, 월암동 입석(선돌)등 대구선사시대의 이모저모를 돌아보면서 대구문화재지킴이회원으로서 사회공헌활동을 하며 우리 조상들의 살아온 모습과 유적들에 대하여 알수 있게되었는바 이를 내 주변에 있는 지인들에게라도 알리어 탐방을 하며 안내는 물론 그동안 체험한 내용들을 해설하며 훌륭한 문화유적에 대하여 홍보할 기회를 갖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 6월중순까지 두류공원 2.28학생의거 기념탑과 두류공원내의 인물동산에 세워진 동상, 기념비, 조각상, 기념탑과 시비 등을 살펴보며 어려운 시기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순국하시기까지 하면서 후손들을 위하여 목숨받치신 선렬들에게 머리숙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참으로 보람있는 사회공헌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앞으로 남은 기간 더욱 뜻깊게 횔동하였으면 한다.

* 6월하순부터는 문화예술회관, 두류산금용사를 탐방하였는데 7월 5일에는 성당못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대구시내에 도시 개발 미명하에 사라진 못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벤처)3조 조원들이 인터넷이나 위키백과사전, 인사이트에 올려진 내용들을 우리 사회공헌활동에 참여한 회원들의 자체연수를 통하여 살펴본 내용을 올려본다.       

 

조정 김병철

김기홍

김  성

박정순

신중식

      

    아래 내용은 (벤처)3조 회원들이 자체연수를 하기위해 카페에서 많은 분들이 조사하여 게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알아본 것임을 밝힙니다.   


]성당못이라는 이름의 유래

==대구지역의 도시개벌로 없어진 못들==

  성당못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2가지가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하나는 이 지역의 산 모습이 성당못 중심으로 하여 용이 승천하는 모양으로 길지(명당)의 의미인 성당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일제시대 때 이곳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는데 독립운동 장소로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된데 따라 성당이라 부른다고 전합니다.

성당못(聖堂)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1동에 있는 못이다. 성당이라는 명칭은 일반적인 의미의 종교 시설인 성당과는 다르다.

   

[유래] 성당못 일대를 옛날에는 성댕이, 상댕이라고 불리다가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고 불렸는데, 동네 이름을 따서 예부터 성당못이라고 했다. 이곳 성당못이 있던 자리는 조선 중엽 채씨 성을 가진 판서가 살던 집터였는데, 국풍(나라에서 지정한 공인 풍수가)이 이곳을 지나다 보니 그 자리가 아주 명당이라 장차 임금이 태어날 명당이라고 해서 나라에서 집을 짓지 못하도록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출처(위키백과:성당못)

 

  성당동(聖堂洞) 원래 위치는 지금의 예술회관자리와 대성사, 독산 부근(성당못 서편)이며 성댕이 또는 상댕이라고 불렀다.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고 불렀는데 그 유래는 다음 두 가지로 전해지고 있다.

1) 길지(吉地)로서 인명의 피해가 없는 좋은 땅이란 뜻으로 성당못을 중심으로 산의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어서 성당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남씨, 채씨들이 살았는데 정승, 판서가 나서 남정승, 채판서의 마을로 알려졌으나 왕기가 서렸다고 해서 용머리격인 독산에 철퇴를 쳐서 남씨, 채씨의 번창을 막았다는 얘기도 있다.

 

  여기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고 하여 성당동이라고 명칭되었다는 얘기다. 이 성당은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현 대성사 위쪽(두류산 서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곳이 대구지역 독립운동 장소로 발각되어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 폐쇄되었으나 1960년 두류산 공원 개발로 순환도로가 개설될 때까지 그 터와 사택이었던 집이 있었다고 한다. 대구부 달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달성군 달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에 대구부가 확장됨에 따라 대구부에 다시 편입되었다. 별장의 설립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동명이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 했으므로 전혀 근거없는 사실은 아니라고 본다. 출처(위키백과:성당못)

 

  대구서부정류장이 성당못이라고 표기되어있는 이유?

  예전에 대구 좀 살았는데 많은 대구사람들이 성당못(서부정류장)이라고 되어있는 거 이해를 못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서부정류장이랑 성당못이 거리가 좀 있거든요.. 근데 왜 굳이 성당못이라는 지명 사용을 하게 된 것은 서부정류장 자리가 예전에 성당못주차장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이 좀 있으신 분들은 서부정류장이라는 이름보다 성당못주차장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하는 분이 더 많아서 부득불 서부정류장이라는 이름에 성당못을 추가해서 표기를 한다는 슬픈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당못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에 위치한 연못으로 성당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상댕이 또는 성댕이라고 불리다가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고 했는데 그 유래에는 아래와 같은 2가지 설이 있습니다.

성당못을 중심으로 한 산의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형상의 명당자리라고 하여 유래

8090년 전에 지금의 대성사 위쪽에 천주교 성당이 있어 성당동이라고 함

   

 대구 사람들도 잘 몰랐던 '성당못'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면서 누리꾼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대구 '성당못'의 위성 사진이 게재됐다. 사진 속 익숙한 형체는 한국 사람이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한반도'의 지형이다.


 

 

 강원도 영월 선암마을에만 있다고 생각했던 한반도 지형이 대구 성당못에서도 발견되자 누리꾼들은 대구에 살면서도 처음 알았다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성당못은 대구 달서구 성당동에 위치한 저수지로, 타고난 명당자리라 나라에서 집을 짓지 못하도록 못을 만들었다는 유래가 있어 한반도를 품고 있는 모습에 더욱 눈길이 간다. (인사이트에서 펌)

 

 호수만 그냥 두었으면 세계적 관광지가 되었을 텐데

[대구 완전 학습] 호수와 고인돌의 도시였던 대구, 30여년 만에 살풍경으로 추락 : 정만진(daeguedu) 편집: 최은경(nuri78)

 

  

  김홍렬


리승주

오늘날의 대구는 깊숙한 내륙 지역으로 인식되지만 아득한 옛날에는 그와 정반대였다. 공룡들이 많이 살았던 14500만 년-6500만 년 전의 대구는 거대한 호수였다. 호수는 대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경상북도 안동, 남쪽으로 전라남도 광양에 이르기까지 평평한 물결을 일렁고렸다고한다.

 

  경상북도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계속 흙을 실어날라 거대 호수를 메운 끝에 마침내 땅으로 변했다. 그래도 지대가 낮은 곳은 여전히 호수로 남았다. 지금도 전국 17505개 호수의 32%5,547개 호수가 경상북도에 있다. 당연히 대구에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화가 본격화 된 1980-1990년대 이전까지는 무수한 호수들이 있었다.


 일제는 191938일 대구 독립만세 운동이 발원된 곳이라는 이유로 서문시장을 본래 장소(달서문 터 앞에서 동산파출소 터 사이)에서 현재의 위치로 강제 이전시켰다.


이만호

안두환

박춘렬

최진택

장순자

 

    일제가 강제로 메운 천왕당지

   대구에서 가장 안타까운 매립 사연을 가진 연못은 천왕당지(天王堂池)이다. 천왕당지의 본래 이름은 남지(南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남쪽은 달성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달성공원은 신라가 서기 261(첨해왕 15)에 달벌성을 축성한 현장인 데서 짐작되듯이 예로부터 대구의 기준점이었다.

 

  천왕당지는 1928년에 매립되었다. 일제는 비산동과 내당동 등지의 고분을 마구 파헤쳐 그 흙으로 천왕당지를 메운 후, 달서문 터(중구 경상감영길 1) 앞에서 동산 파출소 터(동산동 15) 앞 오토바이 골목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서문시장을 그곳으로 강제 이전시켰다. 일제로서는 191938일 대구 독립만세 운동의 발원지인 서문시장을 본래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북대학교 뒤쪽 복현오거리 일대의 배자못, 대구교대 앞의 대명동 영선못, 달성고등학교 일원의 감삼못, 원대 지하도 둘레의 비산동 날뫼못, 수성구청 주변의 범어못, 송라시장 일대의 신암동 소래못, 달성공원 서쪽의 사리못, 대구MBC 앞의 한골못, 메워져 서구청 자리가 된 평리동 들마못, 역시 메워져 효목공원이 된 동구 효목동 소못 등은 일제가 아니라 우리가 없앴다. 대구에는 본래 크기의 30%가량만 잔존한 성당못,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의 본래보다 조금 더 커진 수성못이 남아 있는 호수의 전부이다.

 

  대구는 엄청나게 많은 호수를 거느린 도시였지만 재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모두 매립해버렸다.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은 수성못(사진)이 유일하고, 30%쯤 남은 성당못도 희귀한 잔존 사례에 들 정도이다.

 

 대구는 엄청나게 많은 호수를 거느린 도시였지만 재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모두 매립해버렸다.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은 수성못(사진)이 유일하고, 30%쯤 남은 성당못도 희귀한 잔존 사례에 들 정도이다.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대불지의 흔적을 말해주는 이름들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1370-1번지(대학로 80)의 경북대학교 북문에서 500m가량 오른쪽으로 나아가면 복현오거리가 나온다. 오거리를 지나 250m쯤 직진하면 왼쪽에 '북구 청소년 회관'을 거느린 야산이 나타난다. 야산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공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공원 안 배드민턴장 회원들은 그 이름을 대체로 알고 있을 법하다. 북구 산격동 산9-2번지에 있는 테니스장의 이름은 '대불 배드민턴 클럽'이다. 공원 이름이 '대불 공원'인 까닭에 자연스레 그런 이름을 얻었다.

  

   대불이라면 얼핏 '大佛(대불)'이 떠오른다. 공원 안이나 인근에 대불사라는 고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공원과 배드민턴장에 대불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그뿐이 아니다. 왼쪽으로 대불 공원을 낀 채 검단동으로 넘어가는 도로도 이름이 '대불 서로'이다. 복현동 536번지(검단로 8-14)의 건물에도 '대불 노인 복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구EXCO 뒤편에는 '대불 스포츠 센터'도 있다.

  

  대불동은 없는데 '대불' 이름 붙은 곳은 많아

대불동도 아닌 복현동과 산격동에 대불 공원, 대불 배드민턴 클럽, 대불 노인 복지관, 대불 서로, 대불 스포츠 센터 등이 있다? 이 일대와 대불이라는 어휘 사이에 역사적 상관성이 있겠다 싶은 느낌이 저절로 일어난다. '북구 청소년 회관 건립 유래비'를 읽어본다.

 

  대구의 영봉 팔공산의 웅장한 자태와 유구한 금호강을 인접한 이곳 대불산 자락에 위치한 '북구 청소년 회관'은 원래 대불산 옆 대불지(일명 배자못)이 오랜 세월 동안 '아래들'을 비롯한 산격, 검단 일대의 농토를 비옥하게 적셔주던 것을 이 일대가 유통단지 등으로 개발되면서 그 용도가 택지로 바뀌게 되어 이를 기념하고자 당시 제2대 대구광역시 북구의회에서 '대불지 기념사업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중략) 199851(북구 청소년 회관) 기공식을 갖고 20001228일 개관식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유래비에 언급되어 있듯이, 복현오거리 일대는 불과 25년 전인 1994년만 해도 37천여 평(11,212)에 이르는 크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개발 명목으로 매립하지 않았으면 대구 시민들은 오늘도 복현오거리 일대에서 이 호수와 만나 삶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호수의 이름이 바로 대불지(大佛池)였다

 

  옛날에 이 호수를 가다듬던 사람들은 커다란() 부처()를 발굴했다. 그 이후 호수에 대불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가 1918년에 제작한 <대구지형도>에 처음으로 대불지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전영권의 <살고 싶은 대구, 흥미로운 대구 여행>에 따르면, 불상이 발견된 때는 1918년보다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16세기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18세기 <대구읍지>에는 대불지가 불상지(佛上池)로 기록되어 있다. ()'윗 상'이므로 불상지는 '부처가 물 위로 떠오른 연못'이라는 뜻이다. 즉 불상지와 대불지는 속뜻이 같다. 대불지라는 이름이 16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대불지의 본래 이름은 배자못

   불상지나 대불지로 불리기 전에는 이 호수에 이름이 없었을까? 못의 본래 이름이 '배채못'이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못 주변에 배씨와 채씨들이 많이 거주하여 그렇게 불렀는데, 뒷날 발음하기 쉽게 '배자못'으로 바뀌었다는 구전이다. 그러나 배채못 또는 배자못이라는 이름이 언제 생겨났는지, 그것이 불상지보다 먼저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감삼못이 넓게 펼쳐져 있었던 광장타운아파트와 달성고등학교 일대가 지하철 감삼역 표지판 뒤로 보이는 풍경

 

감삼못이 넓게 펼쳐져 있었던 광장타운아파트와 달성고등학교 일대가 지하철 감삼역 표지판 뒤로 보이는 풍경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의 대구 시민들이 대불지보다 배자못이라는 이름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고장 대구>를 펴낸 권영재도 '당시 많은 학교는 배자못(대불지)으로 소풍을 갔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배자 공원, 배자 배드민턴 클럽, 배자 서로, 배자 노인복지관이 아니라 대불 공원, 대불 배드민턴 클럽, 대불 서로, 대불 노인복지관이 되었다. 배자못은 못도 죽임을 당했지만 그 이름까지 빼앗기고 만 것이다.


  도시 개발 미명하에 사라진 감삼못

  배자못이 없어지기 10년 전인 1984년에는 감삼못이 완전히 매립되었다. '완전히'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보다 10년 이상 전인 1973년에 달성고등학교를 신설하느라 못의 동편이 먼저 매립되었기 때문이다. 7,576(25,000)에 달하던 감삼못 자리의 대부분은 그 이후 광장타운이라는 대단지 아파트가 1, 2차라는 접두어까지 뽐내며 차지하고 있다.

 

감삼동이라는 이름의 유래 중에는 '' ''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대구직할시교육위원회가 1988년에 펴낸 <우리 고장 대구- 지명 유래>에 따르면, 300여 년 전에 원님이 현재의 감삼동 69-1번지 일대인 시등(枾登, 감나무에 감이 많이 달려 있는 산등성)을 지나던 중 붉은 감을 보고 그 탐스러움에 반하여 감탄사를 연발했다.

 

인사차 나와 있던 마을 대표가 감을 따서 원님에게 대접하였다. 원님은 '감이 매우 맛있구나!'라면서 연거푸 세 개나 먹었다. 이윽고 마을 대표가 동명을 지어주십사 청하니 원님은 '감을 세 개나 먹은 곳'이니 '감삼동이 어떠냐?' 하였다. 그 이후 이 마을은 감삼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감삼동에 가면 감나무도 없고 감삼못도 없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세 곳     있어서 감삼동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화도 있지만, 샘터로 전해지는 감삼동 148-6번지, 190-2번지, 284-3번지 어디에도 샘은 없다. <우리 고장 대구- 지명 유래>의 표현에 따르면 '1970년에서 1980년대에 걸쳐 도시의 개발로 주택지로 바뀌어 아파트와 단독주택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을 뿐이다.


최계복의 1933년 작품인 <영선못의 봄>은 이 못의 당시 규모와 성격을 잘 말해준다. (<최계복 사진집>의 수록 작품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 여러모로 다릅니다.) 최계복 관련사진보기

 

 

  대구교대 앞 영선못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

 없어진 호수라면 영선못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진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최계복의 1933년 작품 <영선못의 봄>을 보면 양복에 중절모까지 쓴 중년 신사 등 상춘객을 가득 태운 놀잇배가 영선지를 선유하고 있다. 그만큼 영선지가 대단한 유원지였다는 뜻이다.

대구교육대학 맞은편 영선시장 입구의 <영선못터> 표지석에는 '영선못이 있던 자리는 현재의 영선시장과 그 일대 주택가로 규모는 2만여 평 정도였다. 영선못은 시가지에서 가까운 데다 물이 많고 주변 경치가 좋아 시민들이 여름에는 낚시와 수영, 겨울철에는 얼음지치기 등을 즐기는 휴식처로 사랑을 받았으며, 가뭄 때에는 농사에 이용되었고 장마 중에는 홍수 조절 역할을 했다. 그후 도심지 개발에 따라 매립 공사로 못은 없어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는 안내문이 새겨져 있다.

 

영선못은 자연 호수는 아니다. 2000년 발간 <대구 시사>는 영선못이 조선 말기에 축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영선못은 조선 말기에 12년 동안의 공사 끝에 만들어졌는데, 어떤 고위 관리가 사비를 들여 축조했다고 한다. 도사가 나타나 영선못 자리를 가리키면서 '저곳에 집을 지으면 나라에 아주 해로운 일이 생길 것이고, 12년에 걸쳐 못을 만들면 나라에 아주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깊었던 그 관리가 그 말을 따랐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대구가 아득한 옛날에는 땅이 아니라 거대한 호수였다는 것과, 1980-1990년대의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 매립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사실'을 적시하는 데에 집필 목적이 있지 않다. 지질학적 변동을 고려할 때 대구만큼 수많은 호수를 가진 도시는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는데, 왜 대구는 호수 도시로서의 세계적 위상을 불과 30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잃어버렸을까, 그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대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3,000여 기의 고인돌을 가진 도시였지만 이 역시 거의 대부분을 땅에 파묻고 말았다. 사진은 수성구 상동 171번지 앞에 남아 있는 고인돌.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구에는 그런 지도자가 없었다. 그저 도시 확장이라는 토목적 안목뿐이었고, 그 까닭에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천혜의 자연 경관을 도로 내고 아파트 짓는 눈앞의 재개발 이익 앞에 헌납했다.

 

본래가 거대 호수였기에 수많은 연못을 거느릴 수 있었던 대구, 겨우 30년 만에 호수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의 대구, 그런 대구의 변모를 통해 미래사회를 내다볼 줄 아는 지도자가 있어야 지역 공동체가 다른 곳과 차별성 있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교훈을 깨닫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호수를 거느린 대구, 그 호수에서 신천과 금호강 또는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천변 따라 역시 세계 최다의 고인돌이 놓여 있는 대구, 이제는 그 장관을 볼 수 없다. 호수와 고인돌이 그대로 있었으면 세계 희귀의 관광 도시가 되었을 텐데 단 30년 만에 그 천혜의 기회를 스스로 뭉개버렸다. 그 안타까움을 글로 적느라 몸을 떨면서, 대구가 지금도 잃어가고 있는 다른 것에는 무엇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본다.

   

   대구 성당못 다시 시민 곁으로

대구시 달서구 문화예술회관 앞 성당못이 새롭게 단장됐다.

성당못은 본래 조선 중엽 채씨 성을 가진 판서가 살던 집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국풍(나라에서 지정한 공인 풍수)이 이곳을 지나다가 보니 장차 임금이 태어날 명당이라하여 나라에서 집을 짓지 못하도록 연못을 만든 것이 지금의 성당못이 됐다는 긴가민가할 유래를 갖고 있다.

 

  성당못 두리길. 대구시 제공

그 뒤 오랫동안 시민들에게 물과 녹음이 어우러진 안식처 역할을 해 왔다.

원래는 지금 크기보다 두 배 정도였는데 동쪽을 메워 인라인스케트장과 주차장을 조성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제대로 된 정비가 이뤄지지 않아 시설이 노후되고 볼거리가 부족한 데다 근래에는 여름철 이상고온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녹조와 악취가 겹쳐 해마다 이곳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줄었다.



대구시 두류공원관리사무소는 최근 못에 수질정화 기능이 탁월한 수련을 심고 둘레에 600데크 길을 만들어 성당못두리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류산을 예전에 두리산이라고 한데서 따왔다. 산이 두리뭉실하게 펼쳐져 그렇게 했다고 한다. 정진우 두류공원관리사무소장은 이번에 심겨진 수련을 잘 관리해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방안을 세우고 앞으로 수련 사진찍기 대회 및 풍등축제와 연계한 유등행사 개최 등 구체적인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 성당못 일대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대구=문종규 기자 mjk206@segye.com [세계일보 & Segye.com, ]


▲ (벤처)3조 회원들 김병철 조장을 중심으로 자체연수를 한다.

▲성당못 두리길을 걸으며

▲성당못두리길 중간에서


▲시원한 분수는 무더위를 식혀주는 최고의 선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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